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 이론을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인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는 (원제, The Hell of Good Intentions)이라는 책에서, 정권이 교체되고 국제 정세가 변하는데도 미국의 외교 정책이 잘 바뀌지 않는 것은 외교 정책 생산·집행의 기득권 세력인 ‘외교 정책 공동체’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 공동체에는 국무부와 국방부, 중앙정보국(CIA), 군 등의 정부 기관, 두뇌집단(싱크 탱크), 이익단체 및 로비 단체, 언론매체, 학계 등이 두루 참여하고 있고, 그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이견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고 바라는 정책만 살아남게 된다는 얘기죠.
월트 교수는 이런 기득권 집단을 ‘한 줌의 물방울’이라는 뜻의 블롭(blob), 또는 워싱턴을 감싸는 순환도로의 이름을 따서 ‘벨트웨이’라고 불렀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표현 방식을 빌리자면, ‘심층 국가(Deep State)’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에도 미국처럼 외교·안보 정책을 쥐락펴락하는 심층 국가가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980년대 민주화 이후 보수 성향과 진보 성향의 정권이 번갈아 집권하고 있지만, ‘숭미·친일’ 중심의 외교 정책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그런 정책을 생산하고 주무르는 강고한 집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와 연작을 통해 한국 외교의 문제를 통렬하게 까발린 이창천(가명) 전 대사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군중 시위 때 성조기를 들고나오는 세계에서 유이(唯二)한 국가입니다. ‘미국 숭배의 진(gene)과 밈(meme)’이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깊게 스며들어 있다는 방증입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대미 정책을 두고는 누가 심층 국가의 구성원인지 따지는 게 사치스러울 정도입니다. 정(政)·관(官)·학(學)·군(軍)·종(宗)·언(言) 등 한국 사회의 각 분야에서 잘나가는 사람은 거의 다 그 구성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일 정책은 좀 다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가혹하게 다스렸던 쓰라린 역사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친일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도 겉으로 내놓고 얘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안팎의 차이가 대일 정책에서 심층 국가가 준동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고 있습니다.
한일 관계에서 심층 국가 노릇을 하는 대표적인 조직이 한일포럼(일본은 ‘일한포럼’이라고 부름)입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과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만들어진 한일 민간 대화 창구입니다. 양국에서 각계를 대표하는 50명 정도가 주요 현안에 대해 진솔한 의견 교환을 통해 건전한 양국 관계 발전을 꾀한다는 목적 아래, 매년 한국과 일본을 번갈아 오가며 비공개 대화를 합니다. 올해 8월 서울에서 33차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 포럼에 참가하는 한국 쪽 사람들이 과연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가, 한국의 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올해 한국 쪽 참가자 면면만 훑어봐도 왜 이런 의문이 나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정권은 이재명 정권으로 바뀌었지만, 참가자 대부분은 윤석열 정권 취향이거나 보수 성향 일색입니다.
일례로, 한국 대표 33명 중에 유명환 회장(노무현 정권 때 주일 대사·이명박 정권 때 외교부 장관)을 포함해 신각수·윤덕민·박철희 등 주일 대사 출신이 4명이 들어 있습니다. 유 회장 외에 3명은 모두 보수 정권 시절에 대사를 지낸 인물입니다. 윤석열 정권 때 임명된 박 전 대사와 진창수 전 오사카 총영사는 이재명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불려 들어왔는데도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반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 때 대사를 지낸 사람들은 모두 배제됐습니다. 언론계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 성향의 , , 기자와 기자 출신 기업인은 들어갔지만, 진보 성향 매체에서는 기자가 구색용으로 유일하게 포함됐습니다. 다른 분야도 구성원 편향이 대동소이합니다.
한국 쪽 한일포럼 참가자 구성이 보수·친일 성향 일색이 된 데는 유명환 회장의 책임이 큽니다. 형식적으로 5인 운영위원회라는 내부 논의 기구가 있지만, 회장의 영향력이 절대적입니다. 무엇보다 회장 선임 과정부터 불투명합니다. 그는 2013년 공로명 초대 회장으로부터 회장직을 얼렁뚱땅 물려받은 뒤 10년 이상 장기 집권 중입니다. 한일포럼은 매년 정부로부터 억대의 지원금을 받아 사업을 하지만, ‘민간 자율’을 명분 삼아 정부의 간여를 피하고 그렇다고 내부의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제대로 밟지도 않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렇게 한 사람이 장기 집권하면서 포럼 운영을 사유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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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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