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쪽 참가자 면면만 훑어봐도 왜 이런 의문이 나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정권은 이재명 정권으로 바뀌었지만, 참가자 대부분은 윤석열 정권 취향이거나 보수 성향 일색입니다. 일례로, 한국 대표 33명 중에 유명환 회장(노무현 정권 때 주일 대사·이명박 정권 때 외교부 장관)을 포함해 신각수·윤덕민·박철희 등 주일 대사 출신이 4명이 들어 있습니다. 유 회장 외에 3명은 모두 보수 정권 시절에 대사를 지낸 인물입니다.
윤석열 정권 때 임명된 박 전 대사와 진창수 전 오사카 총영사는 이재명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불려 들어왔는데도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반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 때 대사를 지낸 사람들은 모두 배제됐습니다. 언론계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 성향의 , , 기자와 기자 출신 기업인은 들어갔지만, 진보 성향 매체에서는 기자가 구색용으로 유일하게 포함됐습니다. 다른 분야도 구성원 편향이 대동소이합니다.
한국 쪽 한일포럼 참가자 구성이 보수·친일 성향 일색이 된 데는 유명환 회장의 책임이 큽니다. 형식적으로 5인 운영위원회라는 내부 논의 기구가 있지만, 회장의 영향력이 절대적입니다. 무엇보다 회장 선임 과정부터 불투명합니다. 그는 2013년 공로명 초대 회장으로부터 회장직을 얼렁뚱땅 물려받은 뒤 10년 이상 장기 집권 중입니다. 한일포럼은 매년 정부로부터 억대의 지원금을 받아 사업을 하지만, ‘민간 자율’을 명분 삼아 정부의 간여를 피하고 그렇다고 내부의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제대로 밟지도 않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렇게 한 사람이 장기 집권하면서 포럼 운영을 사유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유 회장은 이념 성향과 정권과 친소를 떠나, 한일 관계에서 한국의 ‘대표’로 나설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김앤장법률사무소의 고문으로 일하며 한일 과거사의 최대 현안인 강제 동원 문제에서 일본 전범 기업의 편에서 일한 사람입니다. 2019년 검찰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직권남용 등의 죄로 기소하면서 내놓은 공소장에 그가 강제 동원 소송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는 그런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회장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고, 포럼 안이나 돈을 지원하는 정부에서, 심지어 언론 쪽에서도 그의 회장 자격을 문제 삼는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당사자는 뻔뻔하게 버티고 주위의 사람들은 눈 감고 덮어주는 심층 국가 구성원의 ‘끈끈한 의리’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겁니다.
한일포럼 말고도 한일 간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나 조직 거의 대다수가 보수 편향, 친일 편향의 인사들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1982년 일본의 교과서 왜곡 파동을 계기로 1984년 한일 간의 문화교류를 증진·강화한다는 목적으로, 대기업이 출자해 설립한 한일문화교류기금을 봅시다. 이한기 초대 이사장이 숨진 1995년부터 이상우(87) 신아시아연구소 이사장이 이사장 자리를 이어받은 뒤 지금껏 1인 회사처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는 이명박 정권과 윤석열 정권에서 친일 외교·안보 정책을 주도했던 김태효 씨의 스승입니다. 그는 2013년부터는 이사장 자리를 유명환(79) 씨에게 물려줬지만, 회장 자리를 만들어 이사장 시절부터 30년 군림을 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 시절인 1999년 한일 문화교류 활성화를 위해 설립한 한일문화교류회의도 비슷합니다. 현재 3기째를 맞고 있는데 정구종(80) 전 동아닷컴 대표이사가 2009년부터 16년째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활동 전체 기간의 60% 이상을 한 사람이 떠맡고 있는 겁니다.
이런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일 관계는 일부 보수·친일 편향의 노인네들이 과다 대표하고 있습니다. 한일 관계는 수직에서 수평으로, 정치·경제 중심에서 문화·예술을 포함한 다방면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는데 한일 관계의 창구를 틀어쥐고 있는 세력은 여전히 수직관계 속에서 정치·경제 쪽에 편향된 교류를 해왔던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할뿐더러 한국의 달라진 위상도 대표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이런 현상이 한일 관계나 외교·안보 영역에만 있는 문제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지금 목도하고 있는 바처럼 외교뿐 아니라 검찰과 법원, 언론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시대 변화를 대변하지 못하면서 계속 이전의 권력을 누리려는 기득권 세력이 강고하게 똬리를 틀고 저항하고 있습니다. 정권이 교체되어도 끄떡없이 권력을 누리는 이들 세력이야말로 심층 국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시대 교체, 세력 교체와 함께하지 않는 상층부만의 정권 교체는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진정한 정권 교체는 사회 곳곳에 숨어 활동하는 ‘그들만의 심층 국가’를 뿌리 뽑고 그들이 자라날 수 없도록 객토 작업까지 끝내는 것, 그래서 ‘모두의 국가’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겉이 아니라 속을, 머리 위가 아니라 발밑을 잘 살피는 용의주도함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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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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