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원전 논쟁의 본질은 원전이 아니다
최근 유럽 정치권에서 탈원전 정책을 둘러싼 의미 있는 발언들이 이어지고 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독일의 탈원전은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역시 “원자력을 외면한 것은 전략적 실수였다”고 말했다.
정책의 오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장면이다. 정책은 언제든 틀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오류를 인정하고 평가하는 정치 문화는 국가 정책을 더 성숙하게 만든다. 실패를 인정하는 정치가 약한 정치가 아니라 책임 있는 정치다.
이 지점에서 한국 정치의 모습은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긴다.
한국 역시 몇 년 전 탈원전을 둘러싼 거대한 정책 변화를 경험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출범 이후 탈원전을 국가 에너지 정책의 핵심 기조로 내세웠다.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중단하고 노후 원전의 조기 폐쇄를 추진하며 원전 축소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해 에너지 전환을 이루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책 추진 과정에서 우려도 적지 않았다. 원전 산업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기자재 기업의 경영 위기와 기술 인력 유출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됐다. 실제로 일부 원전 관련 기업들은 신규 프로젝트 감소로 어려움을 겪었고 산업 기반 자체가 위축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원전 산업은 발전소 건설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백 개의 기자재 기업과 기술 인력, 연구개발 네트워크로 이어진 장기 산업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자 정책은 다시 정반대로 방향을 틀었다. 윤석열 정부는 원전 확대 정책을 선언하며 신규 원전 건설과 소형모듈원전(SMR) 개발, 해외 원전 수출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정책 변화 자체가 아니다. 정책은 언제든 수정될 수 있다. 상황이 변하면 방향을 바꾸는 것도 정부의 역할이다. 진짜 문제는 정책이 뒤집혔는데도 그 정책에 대한 체계적인 평가나 정치적 책임 논의가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유럽 정치권은 탈원전 정책의 판단 오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정책을 추진했던 정치 세력 내부에서도 반성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치권에서는 정책의 성과와 부작용을 냉정하게 따지는 논의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정책이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비용이 발생했는지, 무엇을 교훈으로 남겨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평가가 없다.
그 대신 정권이 바뀌면 정책도 함께 바뀌는 일이 반복된다. 정책의 연속성은 사라지고 정치적 구호만 남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는 나라에서 산업의 미래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기는 어렵다.
에너지 정책은 단기 정치의 도구가 될 수 없는 분야다. 발전소 하나를 건설하는 데만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고 산업 생태계 역시 수십 년의 정책 안정성 속에서 유지된다. 정책 방향이 정권 교체 때마다 급격히 흔들린다면 기업은 투자 결정을 미루게 되고 산업은 불확실성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최근 유럽의 에너지 정책 흐름은 분명하다.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대립시키는 구도가 아니라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함께 활용하는 현실적인 에너지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에너지 안보와 탄소중립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기저전원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국 역시 이제는 탈원전 찬반이라는 정치적 구호에서 벗어나야 한다. 탈원전 정책이 어떤 효과를 냈고 어떤 비용을 남겼는지 냉정하게 평가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책의 방향을 둘러싼 이념적 논쟁보다 정책의 결과를 분석하고 교훈을 남기는 정치 문화가 필요하다.
정책 실패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패를 평가하지 않는 정치 시스템에서는 같은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정치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에너지 구호가 아니다. 정책의 결과를 직시하고 그 책임을 논의할 수 있는 정치다.
정책보다 더 위험한 것은 책임 없는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