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도내 지역화폐가 지역경제의 주요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성과로 평가할만 하다. 그러나 규모 확대라는 외형적 성장 뒤에는 재정 부담, 정책 효과의 불확실성, 운영 비효율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누적되고 있다. 지역 시민단체 좋은정치시민넷이 전북 14개 시·군의 정보공개 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결과는 지역화폐 정책이 이제 ‘양적 확대’에서 ‘질적 전환’으로 넘어가야 할 시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2025년 전북 14개 시·군의 지역화폐 발행액은 1조 7,316억 원으로 전년 대비 14.8% 증가했다. 사용액도 1조 7,194억 원으로 13.5% 늘어 지역경제의 중요한 소비 인프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군산, 정읍, 남원 등 일부 지역은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하며 정책 효과를 체감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지역 내 소비 유도와 자금 역외 유출 방지라는 지역화폐의 본래 목적은 일정 부분 달성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전북 지역화폐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익산시 ‘다이로움’이 역성장 국면에 들어섰다는 사실은 단순한 통계 이상의 경고다. 발행액과 사용액 모두 감소세를 보였다는 것은 지역경제의 소비 활력, 정책 설계, 시민 신뢰도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소비 유형이 일반음식점, 식자재·유통, 보건·복지, 주유 등 특정 업종에 편중되면서 골목상권·전통시장 활성화라는 정책 목표와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은 정책 재설계의 필요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재정 운용이다. 지역화폐는 ‘공공 정책 수단’인 만큼 지속 가능성이 핵심인데, 현재 구조는 재정 부담이 지나치게 크다. 2025년 할인판매보전금 1,970억 원 가운데 시·군 부담액이 1,189억 원으로 60% 이상을 차지했다.
이는 지방재정이 직접 소비 보조금을 떠안는 구조로, 재정 여력이 취약한 기초자치단체에는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한다. 더구나 발행 규모 확대 경쟁이 지속될 경우 재정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운영 효율성 문제도 심각하다. 14개 시·군이 운영 대행사에 지급한 발행 운영비는 83억 원을 넘어섰다. 발행 수수료율은 전주시 0.19%에서 부안군 1.5%까지 격차가 극심하다. 동일한 공공정책임에도 지자체별 계약 구조에 따라 비용 편차가 발생하는 것은 행정 비효율의 전형이다. 개별 계약 방식은 규모의 경제를 포기한 채 각자도생하는 구조이며, 결국 그 비용은 주민 세금으로 충당된다.
이제 전북의 지역화폐 정책은 세 가지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전북형 통합 지역화폐 플랫폼’ 구축 또는 시·군 공동 협의체를 통한 공동 계약 체계가 시급하다. 통합 플랫폼은 발행·운영·정산 시스템을 표준화해 운영비와 수수료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동시에 데이터 표준화로 정책 효과 분석도 가능해진다. 지역화폐가 정책 실험 도구가 아니라 과학적 정책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데이터 기반 정책 설계가 필수다.
둘째, 소비 구조의 정밀 분석과 타겟 정책이 필요하다. 익산 다이로움의 역성장은 단순히 발행 규모 감소가 아니라 소비 심리, 업종별 이용 구조, 할인 정책 설계 등 다층적 문제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명절·축제 등 특정 시기에 집중된 이벤트성 프로모션에서 벗어나, 골목상권·전통시장·청년 창업 상점 등 정책 대상별 차등 지원이 요구된다. 프랜차이즈와 영세 상인을 구분한 세밀한 데이터 구축 없이는 지역화폐가 ‘대기업 소비 보조금’으로 전락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셋째, 재정 건전성 원칙을 명확히 해야 한다. 지역화폐는 경기 부양 수단이지만 영구적 보조금 정책이 될 수는 없다. 할인율과 발행 규모는 재정 여건, 지역 경제 상황, 정책 목표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되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자립적 결제 생태계 구축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무분별한 할인 경쟁은 단기 소비를 늘릴 수는 있지만, 지방재정의 구조적 취약성을 심화시킬 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역화폐는 단기 경기부양 수단을 넘어 지역경제 구조를 바꾸는 전략적 정책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성과 경쟁이 아니라 정책의 지속 가능성과 재정 책임성을 우선하는 성숙한 거버넌스가 요구된다. 도와 시·군, 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정책 평가 체계를 구축하고, 발행 규모·할인율·재정 투입 효과를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투명성 강화도 필요하다.
전북이 지금 선택하는 정책 설계와 재정 운용의 원칙이 향후 10년 지역경제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지역화폐 정책 역시 냉정한 성과 평가와 과감한 구조 개편이라는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지역화폐 정책은 지역경제 혁신의 중요한 도구다. 그러나 정책은 선의만으로 지속될 수 없다. 재정 지속 가능성, 운영 효율성, 정책 타겟팅이라는 세 축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지역화폐는 ‘현금성 복지’가 아닌 ‘지역경제 전략 인프라’로 기능할 수 있다. 전북의 지역화폐가 또 하나의 재정 포퓰리즘 정책이 아니라 대한민국 지방경제 정책의 모범 사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지금이 바로 구조 개혁의 골든타임이다.
전북이 지역화폐 정책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재정 부담을 키우는 선심성 정책에 머물 것인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규모보다 구조, 할인율보다 효과, 정치적 성과보다 재정 건전성을 우선하는 성숙한 정책 전환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