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절을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눈에 남은 풍경으로 기억하기도 하고, 코끝을 스쳤던 냄새와 혀끝에 남은 맛으로 되살리기도 한다. 오래전 들었던 노래 한 소절에 잊고 있던 사람과 풍경이 한꺼번에 떠오르기도 한다. 사람의 기억은 오감을 따라 저장되는 모양이다. 아무리 무더웠던 여름이라도 그 시절이 행복했다면 더위보다는 함께했던 사람과 즐거웠던 일이 먼저 떠오른다.
요즘 한낮의 아파트 단지를 걷다 보면 여름은 귀로 먼저 찾아온다. 나무마다 붙어 울어대는 매미 때문이다. 수많은 매미가 한꺼번에 울기 시작하면 고장 난 기계들이 동시에 돌아가는 듯하다. 가뜩이나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 소리는 여름의 정취보다 견디기 힘든 소음에 가깝다. 밤까지 울음이 이어지는 날이면 관리사무소에 민원이 들어오고, 매미를 없애달라는 요구까지 나온다고 한다. 사람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매미지만 사람들은 매미와 가까이 있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매미에게도 사정은 있다. 오랜 시간을 땅속에서 유충으로 지내다가 땅 위로 올라와 나무를 타고 허물을 벗은 뒤 비로소 날개를 얻는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 수컷 매미가 온 힘을 다해 우는 것은 짝을 찾기 위해서이다. 매미에게는 종족을 이어가기 위한 절박한 구애인데 사람의 귀에는 한여름의 소음으로 들린다. 밤에도 환한 가로등과 건물의 불빛은 매미의 밤낮마저 흐려놓는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도시의 밤에서 매미도 제 시간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린 시절 기억 속의 매미 소리는 지금과 조금 다르다.
70~80년대 농촌에서 자라던 아이의 기억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산길을 걷다 보면 길가 숲에서 ‘츱, 쓰르르, 츱’ 하는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숨어서 침을 뱉는 것 같아 아이들은 그것을 ‘침 뱉는 매미’라고 불렀다. 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해 수풀을 헤집고 찾아보면 무지갯빛이 감도는 작은 날개를 가진 매미가 붙어 있었다. 지금은 좀처럼 그 소리를 듣기 어렵다.
한낮의 벚나무에는 또 다른 녀석이 있었다. 뜨거운 햇볕을 더욱 뜨겁게 만들 듯 ‘쎄울, 쎄울’ 하고 울어댔다. 우리는 그냥 ‘쎄울이’라고 불렀다. 서울에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해서 저렇게 운다며 아이들끼리 웃기도 했다. 이제 와 들으면 서울을 못 가서 우는 쎄울이가 아니라 흘러가는 세월이 아쉬워 ‘세월, 세월’ 하고 우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매앰, 매앰’ 울던 참매미 소리까지 더해지면 여름 산과 들에는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가득했다.
그 많던 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매미가 사라진 것인지, 내가 그 소리를 구별하던 귀를 잃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린 시절에는 매미 한 마리의 울음에도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지금은 수많은 매미가 한꺼번에 울어도 먼저 소음이라는 생각부터 든다. 세월을 살아오며 소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도 함께 달라진 것이다.
머지않아 이 지독했던 여름도 물러갈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매미 소리가 뜸해지고 풀숲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면 우리는 그제야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여름 내내 제 세상을 차지했던 매미가 귀뚜라미에게 계절의 바통을 넘길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렇게 시끄럽다며 귀를 막았던 매미 소리도 조금은 그리워질까? 어린 시절에는 추억을 만들던 소리였고 이제는 무더위를 알리는 소음이 된 매미 울음. 어쩌면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매미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 하나에도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어린 날의 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