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이면 전국의 사찰은 연등으로 물든다. 형형색색의 등불 아래 수 많은 사람들이 경내를 찾고, 사찰은 모처럼 활기를 띤다. 그러나 축제의 열기 속에서도 한 번쯤 돌아보아야 할 장면들이 있다.
대형 사찰의 법회가 열리는 대웅전 앞보다 공양간으로 향하는 공양줄이 더 길게 늘어선 모습은 여전히 어색하다. 물론 절을 찾는 이들에게 따뜻한 한 끼를 나누는 일은 중요한 보시이다. 그러나 부처님 탄생을 기리는 법회보다 점심 공양이 더 큰 관심을 받는 현실은 아쉬움을 남긴다. 신행과 수행의 의미가 행사와 편의 속에 묻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법회에 참석한 지역 인사와 정치인을 소개하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법회 연단이 선거철이라 해도 정치적 발언의 공간으로 변하는 순간 종교가 지켜야 할 경계는 흐려진다. 불교가 사회와 소통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정치적 이해관계가 법회의 중심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사찰 운영 방식에도 고민이 필요하다. 대형 사찰마다 반복되는 주차난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수백 대의 차량이 도로를 메우고 주민들은 불편을 감수한다. 인근 학교 운동장이나 공공시설과 협력하여 임시 주차장을 운영하는 방안은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문제이다. 신도와 지역사회가 함께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또한 자비의 실천이다.
더 큰 문제는 한국불교의 미래이다. 출가자가 줄어드는 현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한때 수많은 수행자를 길러냈던 강원과 승가 교육기관은 지원자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작은 암자는 물론 규모가 큰 사찰도 수행승 부족을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조계종은 은퇴출가자 제도를 도입하였다. 사회 각 분야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사람이 은퇴 후 수행자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문호를 넓힌 것이다. 과거에는 출가 연령과 긴 교육 과정 때문에 중장년층의 출가가 사실상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로운 길을 열어 둔 것은 의미 있는 시도이다. 중요한 것은 제도의 확대 자체가 아니라 수행과 공동체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있다.
문득 오래전 영화 ‘달마야 놀자’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항아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스님들은 항아리 안에 사람이 들어가는 해답을 내놓는다. 반면 조폭들은 항아리를 연못에 던져 물로 가득 채운다. 항아리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불교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는 듯하다. 불교는 과연 세상과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가, 아니면 더 높은 담장과 더 많은 규칙으로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는가. 대승불교는 중생과 함께하는 길을 강조해 왔다. 그렇다면 오늘의 불교는 얼마나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연등의 불빛은 며칠 밤을 밝히고 있지만 그 빛이 비추어야 할 방향은 한 두달로 끝날 수 없다. 부처님 오신날은 축하의 날이면서 동시에 성찰의 날이어야 한다. 한국불교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도 바로 여기에 있다. 더 많은 건물을 짓는 일보다 더 많은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일, 더 긴 담장을 세우는 일보다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부처님 탄생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연등의 숫자가 아니라 자비와 성찰의 깊이로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