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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권을 파괴하는 다단계 하도급

지난 4일 군산의 한 아파트에서 40대 노동자가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지난해 11월부터 국내 한 대기업의 2차 협력업체 소속으로 일했지만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해 생계가 어려워지자 이 같은 선택을 했다.


이와 관련, 민주노총 전북본부는 지난 11일 고용노동부 익산지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다단계 하청 구조가 동료의 극단적 선택을 불렀다”며 “다단계 하청 구조가 개선되고 책임자가 처벌돼 다시는 안타까운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대기업은 하청업체에 자재비와 인건비 등을 포함해 5억 9천만원을 지급했지만 2·3·4차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임금을 지급받지 못했다”며 “원청에서 지급한 비용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부당이득을 취한 사람은 없는지, 비용은 어떻게 사용됐는지 등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민노총전북본부는 지난 5일에도 기자회견을 통해 “티브로드 협력업체인 중부케이블 내에서 부당해고를 비롯한 온갖 부당 노동행위와 괴롭힘이 자행되고 있다”며 “노동인권이 파괴되고 외면당하는 동안에도 티브로드 원청은 노동자와 고객을 외면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지난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24살 청년 김용균씨의 죽음은 ‘죽음의 외주화’ 문제를 우리 사회의 중대한 의제로 끌어올렸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생태계는 끝없는 하도급 구조다. 하청 구조가 이중 삼중으로 가지를 칠수록 인건비가 절감되고 해고도 손쉽다는 이유로 산업현장에서 선호되고 있다.


원청이 하도급을 주면 이를 받은 기업은 또 다른 업체에 하도급을 주고, 이렇게 다단계 구조를 거쳐 아래로 내려갈수록 작업 대금과 임금은 푹푹 줄어든다. 재하청업체 노동자는 가장 적은 임금을 받고 가장 위험한 작업을 한다.


하청업체 소속에 비정규직인 노동자들은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설령 알더라도 하나된 목소리로 사용자와 교섭할 수 없다. 더욱이 일자리를 잃을 위험을 각오하고 개별적으로 문제제기 하거나 일을 거부할 수도 없다.


하청의 먹이사슬 끝에 놓인 말단 업체는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제대로 된 보상은 고사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고 살아야 한다. 원청업체가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 하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 주체가 적시되기도 쉽지 않으며 은폐될 수도 있다.


최근 5년간 10대 건설사에서 발생한 산업재해로 희생된 노동자 중 약 95%가 하청노동자였음이 지난해 국감에서 밝혀졌다.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모든 노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지만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 앞에 무색한 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하도급 업체들이 안고 있는 시간적, 비용적 부담을 덜어줄 실질적 대안이 없이는 요원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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