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40여 년 전에 있었던 5월 17일을 떠 오르곤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5.18이라는 상징적이면서 미완성으로 현재도 진행 중인 숫자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5.17이 무엇인가?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노태우와 정호영 등 신군부 세력들이 정권을 탈취하고자 벌인 군사 쿠데타이다.
역사의 전환기에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진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군대를 동원하는 일이 있었다. 지난 1961년 5월 16일에 있었던 5.16 군사 쿠데타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고려와 조선 등의 오랜 역사에서도 이러한 군인들의 집단적인 반란이 있었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에 의해 잘 진압되거나 수습되었다. 물론 왕이 반란집단을 피해 왕궁을 비우는 등의 역사가 있었으나 아무튼 이후로도 잘 존립되었고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다.
조선 말기에도 갑신정변이나 임오군란 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5.16이나 5.17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정변이었기에 그때를 지금의 군사 쿠데타와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다.
다만, 현대의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성숙한 성장이 있기 전에 있었던 일부 정치군인들의 눈먼 쿠데타가 현대의 역사적 사실의 한복판에 있었던 만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겠기에 매년 이맘때가 되면 다시 이를 조명해 보는 것이다.
혹자는 군부 집단의 혁명적 과업이 민생을 위하고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하는 일이었다고 생떼를 쓰지만, 그것은 엄연한 불법이었고 이후 제정된 법에 따라 당사자들이 줄줄이 기소되면서 처벌되었던 사건이었다.
여기에 당시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했었는데 정권이 바뀌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이를 번복하면서 관련자들을 처벌했던 상황을 보면 법의 준엄함도 정치적 여건에는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같은 사건을 놓고 같은 검찰이 이에 대응하는 것이 국민의 열망적 수준에 미흡하다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아쉬움으로 남은 사건이 되었다.
당시 전북지역에서도 전북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당시 신군부에 반대하는 집단적 시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젊은 피의 저항정신은 숨길 수 없어서인지 광주만큼의 아니었을지라도 당시의 전북지방도 피를 끓는 한이 존재했었다.
지금은 역사와 법의 단죄를 받았지만, 당시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주역들은 지금도 사죄나 사과 한마디 없이 유명을 달리했거나 어디선가 모른 채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범죄를 용서할 수 있을지언정 잊지는 않을 것이다. 또다시 이러한 피의 악순환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러한 행태의 쿠데타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지만 예전 박근혜 정부에서 또다시 일부 군인들이 계엄령을 기획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장이 있었다.
지금의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인 국민은 이제 민주주의라는 의미에 성숙되었다. 정권이 보수와 진보 등으로 바뀌는 것이 순간적인 듯 성숙한 국민 의식이 더 이상 잘못된 정치적 행위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5.17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것이 괴로움의 일상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서 다시 한번 당시를 떠 올리면서 비극의 그 날이 다시 와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