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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영원으로(4)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최병효 칼럼
리프트 아래로 보이는 잘 늘어진 가지들을 가진 매끈한 나무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늘어진 모습이 벚나무 같으나 줄기는 배롱나무 처럼 매끄러워 보였는데 초여름에 트레킹으로 와서 보면 그 정체도 확인하고 꽃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욕심도 생겼다.

“할 수 있다면 봄 벚꽃 아래에서 죽고 싶구나 저 석가가 입멸한 2월 보름 무렵에”라고 노래한 사이교를 흉내내어 “할 수 있다면 겨울날 시부토게 미인목 수빙 아래서 죽고 싶구나 저 예수가 태어난 섣달 마지막 무렵에” 라고 읊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곳이 지상의 천국이 아닐가. 천국에는 오래 머물 수 없는 법이니 내려가야 되지만 천국을 보고 나면 지상의 추악함에 더욱 괴로워지는 것일까? “아름다움은 존재의 추악함을 더욱 참기 어렵게 만든다”의 관찰에 동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로서는 오히려 “아름다움에 대한 추억은 지상에서의 존재의 추악함을 더욱 참을만 하게 한다”라고 말하고 싶다. 

2019년 프랑스 대학 수학능력시험인 바칼로레아 철학 문제중 “시간을 피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논문 주제가 있었다는데 그 답의 하나로 “겨울날 시부토게에 올라가 여유있게 미인목을 바라보며 수빙과 게렌데를 즐긴다면 시간을 일시적이나마 피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쓰고 싶다. 그러한 순간과 순간이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 속에 살 수 있겠지만 영원히 이어지는 순간이란게 있을 수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순간이 아니고 영원이 아닐가. 계산에 밝은 수학자에 묻고 싶다. 아니 그보다 AI에게 묻는게 빠를 것 같다.
천국을 떠나 긴 슬로프를 따라 지상으로 내려가 11:40발 셔틀로 야마노에키로 갔다.

이번 시즌에 젊은 피로 영입된 S대사가 세 회원들의 새로운 리더가 되었다. 그제 예기치 못했던 대장정의 고초를 교훈 삼아 그가 연구해 두었다는 자이안트행 루트를 따라갔다. 비장의 루트는 버스정류장 바로 옆 얼어붙은 호수였다. 진리는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스키를 신고 작은 호수 위를 걸어 바로 자이안트 슬로프 중간으로 들어가 비교적 편안하게 베이스로 내려갈 수 있었다. K대사는 아무리 험한 게렌데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균형감각을 자랑해 왔는데 그만 호수로 내려가는 나즈막한 급경사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눈구덩이에 빠져 스타일을 구기고 말았다.

크로스칸츄리 스키에서는 흔한 그러한 내리막에 익숙한 나로서는 웃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일행은 자이안트 베이스에서 바로 히가시다테야마를 통해 프린스호텔 쪽으로 떠났고 나는 혼자 다시 Aspen카페에 들러 이번에는 카레돈카스를 주문해 먹고 니시다테야마에 올랐다. 거기는 울창한 푸른 숲 지역으로 나로서는 시가고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게렌데이지만 시간상, 어제 이미 점검한지라, 생략하고 신들이 산다는 다카마가하라로 내려갔다. 처음인 그 슬로프들을 따라 인간세계로 내려온 다음, 탄네노모리오쿠죠 스키지역을 그냥 지나치며 편안하게 그린을 따라서 이치노세 페밀리 지역으로 가서 도로 위 슬로프를 따라 다이야몬드 스키장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 긴 능선 슬로프로 야케비타이야마 쪽인 프린스호텔 서관으로 갔다. 일정을 마감하기에는 아직 빠른 오후 3시라서 Rapid2 리프트를 타고 올라 남관으로 내려갔다. 이어 제2 곤돌라로 정상에 오른 다음 올림픽 자이안트 슬라롬 코스 중간에서 오쿠시가로 빠지는 왼쪽의 호젓한 길로 들어서서 오쿠시가 곤돌라로 향했다. 전에 인상이 좋았던 오쿠시가 전문가 게렌데에 도전하고자 내려가니 정설이 안된 모굴 상태라 매우 힘이 들었다. 아직도 모굴을 공략할 실력이 안되어 지친 몸을 추스르며 기어 내려가다시피 하였다. 다시 곤돌라로 올라가 정설된 게렌데를 두어번 타고 야케비타이야마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어 파노라마 코스를 즐기며 프린스호텔 남관으로 내려오니 리프트 마감시간이었다. 용평의 6배가 되는 시가고겐의 주요 슬로프들을 하루에 모두 섭렵한 셈이었다. 호텔 방 욕조에 몸을 담그니 이제 이번 스키는 이걸로 충분하며 마감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내일도 계속 탄다고 하나 나는 다음 날이 마지막 날이니 버스로 인근의 야엔코엔에 가서 야생 원숭이들이 온천하는 것을 보고, 이어 서기 900년대부터 온센마을로 알려졌다는 인근 유다나카 온센 동네에서 점심과 온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스키일인 5일차, 1월7일 토요일 아침 8:20 셔틀로 야마노에키로 가니 바로 유다나카행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40분쯤 가서 야엔코엔 Snow Monkey Park에 내렸다. 칸바야시온센 마을인데 뿔 모양의 높은 유리탑 건물속 카페가 옆에 붙어 있는 칸바야시 로만 미술관 앞에서 내렸다. 식당과 고급 여관이 있는 마을을 지나 눈 덮인 삼나무 산길을 2km정도 오르니 야엔코엔이었다. 인근 계곡에서는 뜨거운 수증기가 뿜어 나오고 원숭이들을 위한 노텐브로가 준비되어 있었다.

몸집이 작은 온대지방 원숭이들이 가족을 지어 편안하게 온센을 즐기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온천을 즐긴다는 야생 원숭이들을 사진에 담고자 분주하였다.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느긋히 여유를 즐기는 놈도 있고, 어느 원숭이 가족은 서로 이를 잡아 주거나 등을 긁어 주고 있었다. 이들은 원숭이 사회의 기본 원칙인 "네가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너를 긁어 줄게"를 철저하게 실천한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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