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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우호의 전제(2)

문학평론가 염무웅 칼럼
두말할 것 없이 케넌의 발상은 세계 전체에 대한 미국의 패권주의를 전제로 한다. 이 발상에서는 미국을 정점으로 하여 지역 내 여러 나라들의 위계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세계 평화의 필수조건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지역 국가들은 미국의 명시적 또는 암시적 지휘에 따라 그리고 각자의 서열에 걸맞게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역량을 배치하는 것이 정책의 최고 임무로 간주된다. 아마 이것이 세계 패권제국으로서의 미국 주류세력의 평화 구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 구도가 최우선적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 상층 자본가들의 탐욕이 ‘평화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 체제 속에서 자본주의는 한없이 발전할 것이 기대되고, 자본주의의 저변으로서 민중은, 인종적으로 백인에 속하든 흑인에 속하든 또 그들이 미국에 살든 방글라데시에 살든, 종속적 삶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거의 대대손손 박탈당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1%에게 낙원인 곳에서 99%는 지옥의 문턱을 넘나들도록 설계된 것이 미국 헤게모니하의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인 것이다.

물론 이 체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서구 강대국들이 자기들 나름의 꿈의 실현을 위해 수백 년 피땀 흘려 애써온 것은 안으로는 산업화, 밖으로는 식민지 개척이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을 우리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근대의 탄생이라 부르는데, 일본은 19세기 중-후반 뒤늦게 이 대열에 참가하여 서구 바깥의 국가로서는 유일한 성공사례가 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예외적 성공을 위한 최악의 희생으로 우리나라는 반세기 동안 식민지 침탈의 고통을 겪었다.

해묵은 과거사를 되짚어 보는 까닭은 그것이 단지 어제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의 문제에 절실하게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웃으로서 일본과 대등하고 평화로운 선린관계 속에 지내야 하고 미국 중국 러시아와도 진정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 나가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언론에 되풀이 보도된 바와 같이 일본의 자민당 정권은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해서는 미국 등에 거듭 사과했지만, 식민지지배와 이에 따른 각종 피해에 대해서는 지난날의 ‘무라야마 담화’조차 계승할 뜻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전쟁기업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전시 동안 강제노역에 동원했던 미국 중국인들에게는 사과와 보상의 뜻을 밝혔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법적 상황이 다르다”며 이를 거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이 말하는 ‘법적 상황’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의 합법성 여부로 귀착된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의 보수 정부와 우익 정치가들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합병조약의 강압성과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침략에 저항한 우리 애국자들을 한갓 테러리스트라고 욕보여 왔다. 1965년의 한일협정 타결과정에서 나타났듯 한국의 권력자들도 합병조약의 원천적 무효를 주장하고 관철하는 데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은 물론이고 평범한 일본인들도 다수는 한일합병이 불법무도한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예컨대, 해방 당시 한반도에는 대략 77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는데, 이들 중 절대다수는 해방 직후에 죄수처럼 고개 숙이고 썰물처럼 본국으로 빠져나갔다. 반면에 당시 일본에 머물던 240만 한국인은 해방과 함께 상당수 귀국하기도 했으나 더 많은 숫자는 그대로 남아 각자도생의 길을 찾았다. 8.15라는 극적 상황에 직면하여 상대방 지역에 거주하던 한국인과 일본인이 보인 이 극명한 반응의 차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영구적인 식민화가 아니라 일시적, 불법적 침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일본인들의 무의식에 반석처럼 굳건히 새겨져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흔히 말하는 일본의 우경화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보수화와도 연결된 동아시아 역사의 전반적 퇴행 현상이다. 군사 대국화 시도에 대한 일본 지식인과 시민들의 저항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운동에도 새로운 영감을 불러오는 청색 메아리이다. 그런 차원에서 한·중·일의 동아시아 시민들이 국경을 넘어 연대를 이루는 것은 평화를 위한 가장 절실한 과제이다.

<끝>

/염무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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