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 로
<본지 논설위원/ 반태산작은도서관장>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나레이션중에 의미 있는 말이 있었다. 바로 약육강식의 세계인 동물들의 삶 속에 비치는 모습들을 표현한 것이 바로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이 된다.’라는 구절이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육식의 동물들에게는 하위 단계의 동물을 잡아먹어야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기에 이 말의 적절성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자연의 순리는 이렇게 누군가는 죽어야 누군가는 살게 된다는 척박한 현실이 바로 떠오른다. 인간이 가축으로 기르는 동물 역시 그것이 사료이든 아니면 동물의 소재로 만든 먹이이든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다른 동물들의 생존을 유지하는 것이니 참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조직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까? 누군가를 비난하고 누군가를 잠재워야 내가 살 수 있는 것일까? 특히 민주사회에서의 권리를 보장받고 있는 요즈음에도 과연 누군가를 잠재워야 내가 살 수 있는 현실이 되는가?
총선이 몇 개월 남지 않은 시간에 정당의 후보 예정자 간에 이합집산보다는 약육강식으로 같은 정당이든 아니면 다른 정당이든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필사적으로 펼치는 모습이 SNS 등에 나타내는 것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사람도 동물의 한 부류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없애야만 하는 것이 일반 동물들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인가? 언어가 있고 생각할 줄 알고 따라서 판단의 기준이 있는 사람이라는 동물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중에는 아직도 일반 동물의 본능을 가진 사람들이 일부 존재하는 것 같다. 특히 정치적인 입지를 다루는 권력층들의 행태를 보면 공의(公義)를 앞세우는 척하면서도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의 성취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없애야만 하는 것이 보이기도 한다.
동물적 본능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닌 자신의 구역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교묘한 것들을 이용하여 떨쳐내는 방법이다. 그것도 국민이라는 이름을 앞세우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 하는 것들을 말한다.
결국, 누군가를 없애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는 논리로 동물적인 야욕을 숨기지 않고 아예 대놓고 이러한 것들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 요즈음 우리 사회의 정치적인 현실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자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처럼 여기면서 일반 국민은 잘 모를 것이라고 했는데 아쉽게도 현대문명은 지식의 첨단화를 걸을 수 있는 각종 정보 채널이 무한경쟁으로 발달하여 이를 단번에 알아차리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불공정한 권력의 향배가 조금이라도 드러나게 되면 과거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들이 이제는 눈앞의 현실이 되어 용서하면서 잊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 될 수 없기에 자신이 살고자 하여 남을 없애버리는 시도는 있을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특히 민주 시민사회의 꽃은 선거라는 제도인데 이 선거를 통해 현재의 구도는 1등만 꽃을 피울 수 있는 제도이다. 지방의원 선발은 약간의 유동성이 있어 선거구가 넓게 책정되면서 1,2, 3등까지도 꽃을 피울 수 있으나 대통령을 비롯한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은 1등만 꽃을 피울 수 있는 제도이기에 다른 사람보다 앞서야 하는 현실이 바로 약육강식을 발해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오로지 나 자신만이 최고인 사회이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고 자신의 강함이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 비해 약해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일부러 강한 척하면서 언론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표시하곤 한다.
특히 정치권에 몸담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것에 길들어 있어 허풍이 심하면서 자신만이 최고라는 그릇된 인식이 자리를 잡은 듯하다. 물론 건실하면서 국리민복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훌륭한 정치인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이 된다는 논리에 젖어 동물적인 본능의 생각으로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된다면 그것은 곧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민폐를 끼치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