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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이 된다 (하)





이 경 로
<본지 논설위원/ 반태산작은도서관장>


예전의 TV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가 자신의 몸을 해부하라고 하면서 허준에게 칼을 내밀어 장기를 살펴보게 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다. 한의학을 위주로 하는 당시의 의술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행위이다.


대부분 침이나 뜸을 놓고 처방을 통해 한약을 다리는 것이 한의학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시신에 칼을 대어 시신 내부에 있는 장기를 적출하여 살펴본다는 것은 유교적인 도덕 사회의 기준에 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허준은 그 덕분에 사람의 장기에 대한 정확한 기술과 내용을 알게 되었고 의학적 처방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보면서 동물적 본능이 아닌 이성적인 판단 때문에 ‘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이 된다. ’ 는 말을 희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최근 미국영화로 재조명되고 있는 미드웨이를 보면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서의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는 비행사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니 이 또한 이들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삶이 되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희생에 따른 인간의 죽음은 정신적 가치를 동반한 누군가의 삶으로 연결되어 진다. 남수단에서의 봉사활동을 펼치다 아깝게 요절한 고 이태석 신부 또한 이들의 희생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죽음이 가져다준 여론의 향배는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아프리카 오지의 수단이라는 지명을 알게 되면서 우리 사회의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준 계기가 되었다.


바로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이 된다는 말이 꼭 동물적인 약육강식만은 아닌 것 같기에 사람들의 희생에 따른 결과로 누군가의 삶의 되는 현실이 바로 이웃이면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납골당에서 유족들이 작성해 놓은 수많은 말의 쪽지를 본 적이 있다. 유골함에 담긴 한 줌의 가루에 작은 사진과 편지 등이 빼곡히 붙여 있을 때 그들의 애절함을 생각하며 죽음보다는 새로운 삶에 대한 애착을 느낀 일이 있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현실에서의 아픔을 생각하지만 죽음이라는 작은 유골함 안에서의 추억과 애정을 생각하면서 삶의 새로운 소망을 찾게 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납골당에서의 기운보다는 감동의 사진과 글귀를 보며 죽음 앞에서 삶을 찾는 현실이 바로 사람이 가진 정신의 가치가 아닐까 해본다.


사람의 희생에 따른 결과는 여러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우선적인 경향이 없고 좀 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찾을 수 있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비록 영화의 한 장면들이지만 최근 개봉된 영화의 ‘ 백두산 ’ 에서도 화산 폭발을 막을 수 있는 핵무기의 폭파를 한사람의 희생으로 끝냄으로써 다수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감동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의 일환일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님비 근성에 자신들의 입지만을 우선적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참 많다. 지금은 여론의 경향으로 잠시 머뭇거리지만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진 사물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에 들어오게 된다고 하면 기를 쓰고 반대에 반대를 거듭한다.


사람의 기본적인 생각으로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극복할 때 전정한 동행과 더불어 삶이 지속할 것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희생이라기보다는 이제는 양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내가 양보할 때 상생이 되어 다른 저쪽에서도 양보하면서 상생의 길이 열려 더 이상 ‘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이 된다. ’ 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중국 우한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고 우리나라 역시 이를 잘 대처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이 된다. 라는 것이 아닌 더불어 공존 공생하는 조화와 균형이 있는 사회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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