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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호남 문화유산, 지리산 여원치 마애불상(女院峙 磨崖佛象) 상


    김 도 영
<예원예술대학교 교양학부장/ 본사 자문위원>
 
전북 남원시 이백면 여원치 정상 아래에 있는 바위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 1998년 11월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2.5m, 어깨 폭은 1.09m이다.

불상의 앞면에 건물을 구성한 것으로 보이는 시설이 있으며, 주위에 기와 조각도 흩어져 있어서 불상을 모시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리산 문화권에서 신라의 산신을 가장 정통으로 보여주는 산신상이 여원치 마애불이다.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 삼산 오악의 배치에 따라 경주 지역의 산신 숭배가 그대로 전라도 지역 수도로써 지정된 남원 소경에까지 확산된 사실을 보여주는 불상으로 의의가 있다.

남원권의 지리산에는 유독 다른 지역보다 마애불상이 많다. 경주 지역의 마애불에 비하여 조각 기법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마애불 가운데 여원치 마애불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이후 남원 지역에서 마애불을 어떻게 인식하고 조성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원치 마애불 옆에는 1901년(광무 5)에 조각한 명문도 있는데, 이 명문으로 남원 지역에서 이 마애불을 어떻게 숭배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여원치는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이 마애불은 고갯길을 넘어가는 9부 능선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남향한 암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아랫부분이 매몰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입상으로 추정되고, 희미하지만 두광의 모습이 있다.

얼굴의 볼은 두툼하게 살찐 모습이며, 입술 또한 두툼하여 미감이 좋다. 고려 불상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낸 살찐 얼굴 형상이다.

코가 작아 보이고 양쪽 귀도 어깨까지 길게 늘어트렸다. 목에는 삼도를 둘렀고 법의는 통견이며,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왼팔은 절단된 형상으로 전한다. 마애불 앞에는 돌기둥이 있고, 마애불 암면에는 기구물을 설치할 수 있는 흠이 파여 있어서 예전에는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음을 추측할 수 있겠다.

고려 말 왜구는 해안 곳곳에 출몰하여 닥치는 대로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고려 우왕 6년(1380) 충남 진포(현재 군산시)에 침입한 왜선 500척을 최무선(1325 ~ 1395)은 화약으로 모두 격퇴하였다. 최무선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고, 이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친 위대한 과학자이자 무인이었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수입하여 고작해야 불꽃놀이에만 이용하곤 했던 당시에 선구자적인 안목과 노력으로 화약을 개발하여 국산화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고려는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

이에 퇴로를 잃고 도주하던 왜구 잔당들은 인월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삼도순찰사로 삼아 이곳 왜구를 정벌하도록 급파하였다.

이성계는 군사를 이끌고 남원을 거쳐 운봉을 향해 진군하던 도중, 아흔아홉 구비의 여원치 험준한 고개를 넘어 고개 정상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를 가리더니 비몽사몽 간에 노파가 나타나 왜구와 싸울 시기와 장소, 전략을 알려 준 후 홀연히 사라졌다. 노파는 당시 여원치 주모였다고 한다.

남원을 향하던 왜구가 주막에 주둔하는 동안 여인의 젖가슴을 만지며 희롱하였다. 수모를 당한 여인은 비분강개하여 부엌칼로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인의 원혼이 노파로 변신하여 자신의 원수를 갚고자 이성계 앞에 나타나 왜구를 격파할 전략을 일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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