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도 영
<예원예술대학교 교양학부장/ 본사 자문위원>
<지난 상편에 이어 계속>
드디어 이성계는 황산대첩을 이룬 후 원통하게 죽은 여인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노파를 만났던 여원치 석벽에다 오른쪽 젖가슴이 잘린 여상(女像)을 새기고 산신각을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을 자연스레 여원치라 부르게 되었고, 여원치에서 잠시 병마를 주둔했던 진지를 병막동(兵幕洞)이라 이르게 되었으며 제왕산 산신제단에서 진지를 바라보니 비단으로 길게 다리를 놓은 듯하여 장교리(長橋里)라 명명하게 되었다. 장교리의 지명은 원래 진들(깊은 들)이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전하는 설화의 내용을 담은 석벽의 비문은 광무 5년(1901) 7월 운봉현감 박귀진(朴貴鎭)에 의해 산신각을 중수하고 새긴 것이다.(「운성지」의 기록에 당시 현감은 이교승으로 적혀 있다.)
여원치 마애불은 지리산의 성모천왕이 선도산 신모 신앙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단적인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명문 내용에서 신라계 성모 신앙의 요소를 추려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애불을 ‘유녀상영각(有女像影刻)’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불상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경주 삼산 여신과 선도산 성모와 다를 것이 없는 사례이다. 이 마애불을 여성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시기는 불상을 조각하던 당시부터라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명문 내용의 핵심은 1380년 황산대첩 당시에 이성계 장군이 왕실의 명으로 남원 운봉으로 파견되고 여원치에 당도하였을 때 꿈에 여원치 산신이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마애불을 ‘도고(道姑)’라고 인식하고 있다.
도고는 도교계 여신이면서 노구계 여신으로 볼 수 있다. 도고는 『삼국유사』 ‘선도 성모수희불사’의 내용에서 선도산 신모가 자신을 여선(女仙)이라고 밝혔을 때의 그 신격과 같다.
도고는 여신과 노구가 조합된 신격으로 지리산 노고단의 산신이 도고와 같은 계통이라고 본다. 명문에는 도고가 산신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셋째, 도고가 ‘고이대첩일시인홀불견(告以大捷日時因忽不見)’하는 영이로음을 보여준다. 이성계가 여원치 고개에 올랐을 때에 갑자기 나타나 대첩의 일시를 알려주고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 내용은 경주의 삼산 여신이 홀연히 나타나 김유신에게 적진의 계략을 알려서 발길을 돌리게 한 것과 같다.
여원치의 산신은 홀연히 나타나 이성계에게 왜군의 동향과 대첩의 일시를 알려 승전을 거두도록 돕는다. 경주의 삼산 여신이 호국산이듯이 여원치의 산신도 호국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의 내용은 1901년에 쓴 마애불 관련 명문에 근거한 것이지만 여원치 마애불이 조성되던 당시의 고려 시대의 산신 숭배가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조선 시대까지 내려왔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문화재청 자료(호남문화유산 이야기 여행, 2011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