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도 영
<예원예술대학교 교양학부장/ 본사 자문위원>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마천 방면으로 가다보면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 만수천변에 호국사찰로써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실상사가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사적 309호로 1984년 10월 19일에 지정되었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 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동쪽을 향해 보면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발 아래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 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로 건재하다.
천년 사찰, 호국 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을 수도한 후 귀국하여 선정처를 찾아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헤매다가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고 창건하였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홍척이 문을 연 실상사는 당시에는 지실사(知實寺)였다. 실상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 초기부터인데, 홍척의 존칭인 ‘실상선정국사(實相禪庭國師)’의 앞머리를 따서 이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홍척이 머물렀던 지실사는 지금의 백장암이며,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의 뒤를 이은 제2조 수철화상(秀澈和尙)이 지금의 실상사 자리로 옮겼다는 주장도 있다. 이곳에서 홍척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되자 왕실에서도 이를 주목하고 그를 경주로 초청한다.
그리고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과 태자 선광은 홍척에게 귀의하고 제자가 되기에 이른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인 수철화상과 편운 스님이 가르친 수 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이후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조 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되었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 번째 중건을 하였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 번째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 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사변을 맞이하여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수난의 역사를 겪게 되는데, 다행히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문화재청 자료(호남문화유산 이야기 여행, 2011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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