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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호남 문화유산- 천년 호국사찰 남원 실상사(實相寺) ④


    김 도 영
<예원예술대학교 교양학부장/ 본사 자문위원>
 
실상사에는 창건 당시의 석조문화재와 고려 시대의 철조여래좌상이 있다. 실상사가 개창되던 통일신라 말기의 신라 계통의 석탑과 석등 부도 등도 있다. 대표적으로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임에도 불구하고 기단부의 구조와 각부의 장식적인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여주는, 이른바 공예적인 이형석탑(異形石塔)이라고 하겠다.

기단부는 네모난 지대석 위에 별개의 돌로 탑신 굄대를 조성하여 얹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굄대의 상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나 측면에는 사방에 난간형을 돋을새김하여 둘러서 흥미롭다.

탑신부에서는 초층 옥신이 너비에 비하여 높으며 2·3층의 옥신도 감축도가 많지 않아 또한 특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옥개석은 각 층 모두 처마가 직선이고 네 귀 전각의 반전이 경쾌하며 낙수면(落水面)도 평박하여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법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 하면은 층급을 이루지 않고 있어 이것도 또한 특수한 점이라 하겠다.

상륜부는 약간 결손된 부분도 있으나 방형의 노반석 위에 복발(覆鉢)·보륜(寶輪)·보개(寶蓋)·수연(水煙: 탑의 구륜 윗부분에 불꽃 모양으로 만든 장식) 등 부재가 정연하게 완전한 찰주(擦柱: 탑의 중심기둥)에 차례로 꽂혀 있음은 희귀한 유례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각 부의 구조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 밑에 섬세하고도 화려한 조각이 가득히 조식(彫飾)되어 더욱더 주목된다.

즉 초층옥신석 사면에는 보살입상과 신장상 2구씩을, 2층옥신 각 면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2구씩을, 3층의 사면에는 1구씩의 천인좌상(天人坐像)을 각각 돋을새김하고 있어 만면(滿面)에 조각이 화려하며, 2층과 3층 옥신석의 하단에는 난간을 둘렀다. 또 상단부에는 3층에 다같이 목조건축의 두공형(斗栱形)을 새겼다. 1층과 2층 옥개석 하면에는 앙련(仰蓮)을 조각하였고 3층 옥개석 밑에는 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이와 같이 각 부 구조에서 전형적인 양식에 구애되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볼 수 있고 각 부재의 표면조각에서도 특이한 의장을 찾을 수 있는 점이 신라시대 굴지의 아름답고도 특수한 형식의 탑이라 하겠다.

한편, 철조여래좌상은 철근을 녹여 만들었는데 불상의 조형미가 뛰어나다. 특히 불두의 나발 부분은 섬세한 조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의 규모가 웅대하여 거불 문화가 성행하던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불교의 대중화와 지방 세력들에게 불교의 중심이 옮겨가면서 불상이 거대해지고 불상의 조각 양식이 투박해지는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실상사의 철불은 지리산 천왕봉과 마주하고 있다. 일본에 정기를 뺏기지 않겠다는 풍수 비보적인 호국 사찰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듯 싶어 든든하다. 약사여래상으로 판단되는 철룹은 통일신라 후기 시대적 혼란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고통을 말해주는 것이며 질병치료를 기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세 이익적 민중 신앙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는 문화유산인 것이다. 아울러 철조여래상은 고려 시대 사원 경제가 발달해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개산조인 홍척 국사의 사리를 모신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의 부도로 전체적인 모습이 대체로 길쭉한 느낌을 준다. 증각은 홍척국사의 시호이다. 팔각원당형의 부도탑으로 높이가 2.4m이며 특히 옥개석에 목조건축의 각 부를 모각하였으며 탑신의 각 면에서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부도는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최초의 산문인 지리산 실상산문의 개산조 홍척국사의 사리탑으로 신라말인 9세기 후반의 우수한 조각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실상사는 불교 탄압으로 사찰들이 훼절당할 때인 숙종 연간에 30개 동의 전각을 다시 복원하는 등 중창불사를 일으킨다. 이러한 불사는 실상사가 호국 불교 중심의 전통을 계승하는 사찰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남원 지역은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을 경유하면서 사찰이 초토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는 민심이 흉흉해지고 가문과 질병으로 민중 생활이 불안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이때에 실상사를 중창하였던 것은 비보적 호국 사찰의 기능을 다시 불러일으켜 국가적 혼란을 진정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 시기는 민간 신앙과 불교가 결합하여 민간 계층에 확산되어 가던 시점으로써 실상사의 중창으로 민생 안정의 적절한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현재 실상사 입구에 세워진 3기(1기는 유실됨)의 장승도 숙종 연간 중창 불사를 하면서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승을 세수던 시기에 실상사 주변에 세웠던 입석도 풍수 비보적인 민간 신앙을 호국 불교 사상에 대입시킨 결과일 것이다.
(문화재청 자료(호남문화유산 이야기 여행, 2011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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