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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호남 문화유산-별천지 신선사상과 이상향 무릉도원- 광한루원(廣寒樓苑) ①


김 도 영
<예원예술대학교 교양학부장/ 본사 자문위원>

시인묵객들은 궁궐에는 경회루(慶會樓)가 있고 지방에는 남원 광한루(廣寒樓)와 더불어 평양의 부벽루(浮碧樓), 진주 촉석루(矗石樓)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 불려지는데 그 중 으뜸은 광한루라 했다.

경회루는 궁궐의 건물로 왕실에서 지은 곳이며, 지방의 누각 중 평양의 부벽루는 애석하게도 아직은 가볼 수 없는 곳이고 진주 촉석루는 안타깝게도 6ㆍ25 때 불에 타 지금의 건물은 1960년 5월경 복원한 것으로 복원 역사가 짧으며, 밀양의 영남루 역시 1844년에 지어 복원 역사가 길지 않다.

그러나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26년에 복원한 건물로 복원 역사 면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광한루원은 경복궁 경회루의 지원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정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하며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 모체가 되고 있다.

광한루는 보물 제281호이며 광한루원은 사적 제303호이다. 광한루는 건축물로서 누정(樓亭)이며, 광한루원은 조경 공간으로써 광한루를 포함한 경원(景苑)이다. 우리는 흔히 광한루로 통칭하여 부르고 있는데 정확히 구분하여 불러야 한다.

특히 남원 광한루원은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이다. 우리 선조들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그 원리를 쫓아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신선 세계의 공간으로 조영한 놀라운 별천지(別天地) 공간이다.

우리 선조들이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자연과 인간이 합일하는 자연관을 원림이라는 공간으로 구현한 곳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천상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믿어왔다. 그곳은 지상의 인간과는 다른 완성된 인간, 즉 신선이 살고 있다고 믿었고 그곳에 사는 사람과 같이 되고픈 꿈을 품었다. 그래서 이곳 광한루원에 시간적 순차에 따라 천체 우주를 상징하는 구성물들을 완성시켰다.

광한루원은 신선이 산다는 월궁(月宮)을 모체로 전설 속의 이상향과 자연의 원리를 바탕으로 요소요소에 그것을 상징하는 구성물로 채워 놓았다. 그리고 선조들은 그 속에 동화되어 자신을 수양하고자 하였으며, 자타 구분없이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광한루원을 개방적 구조로 축조하였다.

광한루원은 자연의 원리를 구현하고 남원이 가진 속성을 대입시킨 남원의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광한루원은 근세 전기에 조영된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는데 한국의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데 모체가 되고 있으며 정원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고 통시대적 문학사에 나타난 정원양식을 표현하고 있어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남원시민들은 이런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춘향이와 이도령이라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등장시켜 당시 시대적 불합리성을 타파하고 평등한 사회를 염원하는 서사 구조를 엮었다.

<춘향전>은 흥부전, 변강쇠타령 등의 판소리계 소설과 <홍도전>(최척전), <만복사 저포기> 등의 서사문학이 남원을 배경으로 쓰여지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광한루는 선조들의 자연친화적 사상과 신선사상, 조선 후기 서사문학의 정신이 어우러진 선조들의 문화유산 테마파크이다. 

광한루와 춘향전은 소설, 판소리, 영화, 연주, 창무극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배경지로 세계 각국에 알려져 있다. 이 광한루는 본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세종 원년(1419)에 황희(黃喜, 1363~1452) 정승이 양녕대군이 보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쫓겨나서 이곳 남원으로 내려와서 광통루(廣通樓)를 세운 데서 연유한다.

이후 1444년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하늘의 월궁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와 흡사하다 하여 광한루로 개칭하였고, 1582년 남원부사 정의국이 광한루를 중수하고 오작교(烏鵲橋)를 가설하였다.
(문화재청 자료(호남문화유산 이야기 여행, 2011년)  참조.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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