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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벽화 속의 전통무예, 수박[手搏]


 윤 현 정
<예원예술대학교 교수/이학박사>
 
고분(古墳)은 과거 및 현재의 무덤 중에서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는 분묘를 말한다. 분묘에는 각종 껴묻거리가 풍부하게 매장되었다.
따라서 매장품들을 통해 고대인의 사상 및 신앙, 기타 관계된 풍습과 예술 등을 파악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분벽화는 종교·신앙의 세계를 무덤 주인이 살고 있는 세계의 단면을 시공을 초월하여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분묘는 건축의 한 분야이고, 그 안에 그려진 벽화는 미술의 한 장르이다.

그 중 ‘안악3호분’은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고분이다. 357년(고국원왕 27년)에 조성되었는데, 고구려 시대 벽화 고분 중 연대가 알려진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한국 최고(最古)의 벽화고분으로써 우리 민족의 뛰어난 예술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흙무지벽화돌방무덤이다. 

이 고분의 앞방 동벽 동쪽 곁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남쪽에는 수박희(手搏戱)와 부월수(斧鉞手, 도끼병)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수박(手搏)’이란 '손치기'라고도 부르는 권법의 일종인데 두 사람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서서 손으로 힘과 기술을 겨루는 놀이로 지금의 택견, 권법, 권투, 손뼉치기 등과 일정한 관련성을 지닌다.

중국 한나라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맨손 격투기의 명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며 실제로 국내 무술인들이 한국의 맨손 격투기의 원형이라고 전하고 있다.

수박은 손을 쓰되 상대를 잡거나 안아 쓰러뜨려서는 안 되며 반드시 떨어진 상태에서 기술을 펴야 하는 신사적 겨루기이다. 따라서 수박을 잘 하려면 손동작과 몸놀림이 재빨라야 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수박을 무술 훈련의 기본기로 삼았고 특히 조선시대에 군인을 뽑는 시험 과목으로 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수박 장면이 고구려의 세칸무덤, 춤무덤, 황해도 안악 3호분에 그려진 것을 보면 고구려 사람들이 이를 씨름 못지않게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안악 3호분의 수박 그림과 비슷한 것이 무용총에도 보인다. 수박 장면은 무덤의 널방 천장부 고임 안쪽 벽화에 그렸다. 이곳에서는 주로 하늘세계를 표현하였는데, 해와 달, 천마, 연꽃 등 천지 간의 각종 사물 형상과 선인들이 그려져 있다.

수박 장면은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끈으로 동여매고, 저고리와 바지를 벗어 제친 반나체의 두 사람이 상대방을 공격할 듯한 대련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가 큰 서역계통의 인물이다.

수박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주로 무인들의 무예 연마를 위한 수단으로 성행했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정중부는 의종 앞에서 군사들에게 수박희를 시연하게 했고, 최충헌은 수박에서 이긴 군사에게 교위(校尉), 대정(隊正) 자리를 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한편, 이의민은 본래 천민 출신임에도 수박 경기에서 맹활약해서 왕의 눈에 띈 것이 출세의 시작점이었다. 특히 충혜왕은 수박희를 좋아하여 수시로 정자, 궁, 마암 등에서 직접 수박희를 관람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수박희로 시험하여 군사를 뽑았다거나, 왕이 수박 잘하는 사람을 별도로 뽑아서 연회 때 하게 했다는 수박과 관련된 기록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수박희가 15세기에 이미 민간의 세시풍속으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성종 때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충남 논산 은진과 전북 익산의 여산의 경계 지역인 작지(鵲旨) 부근에 양쪽 주민들이 매년 7월 15일에 모여서 수박희로 승부를 겨루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조선 전기에 민간에서 수박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세시풍속사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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