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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 여류 서화가, 광덕산 부도암(현, 순창 강천사) 설씨부인권선문(薛氏夫人勸善文) ①


김 도 영
<예원예술대학교 교양학부장>
 
 『설씨부인권선문(薛氏夫人勸善文)』은 조선 중기의 문신 신말주(申末舟)의 부인 설씨(1429~1508)가 54세였던 성화 18년(성종 13년, 1482년)에 순창의 광덕산 부도암(浮屠庵, 현, 강천사)을 개수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신도들이 돌려볼 수 잇도록 해행서로 지은 권선문첩으로써 불교 인과법에 의해 약비라는 승려에게 써 주었다고 해서 『증약비문(贈若非文)』이라고도 한다.

이는 정인보(鄭寅普, 1882~1950 납북)가 1934년 8월 순창의 설씨부인 고택을 방문하고 이를 발굴하여 동년 9월 7~9일에 동아일보에 「권선문평해(勸善文評解)」를 연재하면서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위탁 보관 중이다.

조선 초기 여류 서화가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설씨부인(1429~1508)과 신사임당(1504~1551) 그리고 허난설헌(1563~1589)이 있다. 이 중 설씨부인은 신사임당보다 무려 75세의 연상이니 두 세대 이상을 앞선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었고, 그동안 제대로 된 연구나 조명을 받지 못하였다.

설씨부인은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薛聰)의 28대 손녀이다. 설총은 통일신라시대 유학자로서 문장에 능하고 불경에 정통하였던 문장가이자 사상가였다. 단종 시기에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있다가 세조의 단종 폐위에 상심하여 처향으로 낙향했던 신말주(1429~1503)가 남편이 된다.

설씨부인이 이 권선문첩을 지은 것도 문장가 집안의 핏줄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유학자의 아내이면서도 불교를 선호하였던 것도 이러한 가풍과 관련성이 있었던 것이다.

설씨부인은 사직 설백민의 딸로 세종 21년(1429)에 전북 순창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여 여성으로서의 문장과 필재(筆才)가 탁월하고 정숙한 덕성을 갖추어 덕망을 높였다 한다.

신말주에게 출가하였는데, 부군이 전주부윤 수군절도사의 임직에 오르게 되어 정부인(貞夫人)이 되었다. 태인 현감을 지낸 신잠의 아들인 신말주는 조선 초기 화맥의 가풍을 이어 온 고령 신씨 가문의 인물이다.

그녀는 시아버지 신잠을 위해 불경을 베껴 쓰면서 불교를 접하고 불심을 키웠다. 신말주의 형인 집현전 학자인 신숙주도 문장과 글씨에 매우 능하였고, 그의 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에는 222축에 이르는 안평대군의 역대 명서화의 소장 목록인 「비해당화기(匪懈堂畵記)」가 실려 있을 정도로 서화에 관심이 높았다.

설씨부인은 이처럼 조선 초기 서화에 뛰어난 내력을 가진 신씨 가문에서 자연스럽게 서화를 접하고 익혔던 것이다.

특히 신숙주가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찬문을 쓴 것에 영향을 받아서 ‘권선문첩’에 광덕산 부도암도를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신씨 가문에서는 신유, 신혼 형제와 신선부가 문인화가로 명성을 떨쳤고, 조선 후기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신윤복도 신말주 가문의 후예이다.

이처럼 조선 초기부터 화풍이 뛰어난 신씨 가문과 불심과 문장이 뛰어났던 설씨 집안이 혼인을 하여 설씨 부인이라는 여류 서화가를 배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설씨부인이 이 권선문을 짓게 된 내력은 설씨가 남편과 함께 전북 순창에 낙향해 있을 때, 광덕산(廣德山, 강천산 계곡 안의 남쪽 산)에 절을 세우기 위하여 1482년(성종 13)에 신도들에게 시주를 권선하는 글을 짓고 사찰의 설계도를 그려 돌려보게 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신말주가 처향으로 낙향한 이후 순창의 남산대에 귀거래사를 연산시키는 귀래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유를 즐길 때의 일이었다.
(문화재청 자료(호남문화유산 이야기 여행, 2011년) 참조.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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