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재는데 이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삼각 측량법'이다. 두 장소에서 거리를 재고 싶은 곳을 보았을 때 보이는 방향이 크게 다르다면 거리가 가까운 것이다. 그다지 차이가 없으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곳 사이의 거리나 측정하는 대상이 보이는 각도를 알면 정확한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달까지의 거리도 지구상의 두 점에서 보이는 위치를 측정해 구할 수 있다. 사람이 눈앞에 있는 것들의 멀고 가까운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것도, 뇌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에서 보이는 것이 다른 점을 이용해 거리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먼 거리지만 다양한 기법을 동원하여 잴 수 있는 거리도 있다. 한국도로공사 홈페이지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첫 고속도로인 경부고속도로의 총 연장은 418㎞ 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가까워도 잴 수 없는 거리도 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과 마음의 거리이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라도 마음의 거리가 너무도 먼 경우가 있고 아무리 가까운 친구인데도 마음은 먼 경우가 많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늘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과 마음의 거리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기차를 이용하면 불과 세 시간 이내에 갈 수 있고 자가 운전을 해도 대여섯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에 도착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어떤 경우에는 몇 년이 지나도 목적한 사람의 마음에 도착하지 못한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임종의 순간이 되었는데도 아직 도착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것이 한이 되어 눈을 감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서에 따르면 연약한 우리 사람들에게 신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한다. 본래 신은 위로의 신이라고 한다. 성서에서 보여주는 것에는 신은 위로의 신으로 소개되고 있다. 세상에는 위로 대신 마음을 할퀴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신은 싸매고 어루만지고 격려하고 힘을 주는 위로의 존재이다.
더구나 신의 위로는 립 서비스로 끝나는 형식적 위로가 아니라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라고 한다. 마음에 닿도록~~, 위로가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의 깊은 마음에까지 도착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종종 장례식을 하면서 기독교 목사의 메시지가 상중에 있는 가족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어린 자식이 죽어 슬퍼하는 어머니를 앞에 놓고 위로가 마음에 닿도록 말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위로 한다는 말에 ‘당신의 자녀들은 잘 크고 있잖아요? 어찌 제 마음을 아시겠어요?’ 라고 항의하는 것 같은 눈빛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어느 날 나이가 지극한 어르신이 아이를 잃은 젊은 엄마를 끌어안고 함께 울면서 위로를 한다. 그런데 그 어르신의 위로는 목사의 위로와는 차원이 다르다. “ 이봐, 새댁. 많이 울어. 나도 자식을 둘이나 앞 세웠어......아무리 울어도 자식이 살아오지는 않더라고~~~ 그러니 몸 상하니까 그만 울어. ” 그 어르신의 위로가 진정 젊은 엄마의 마음에 닿는 위로다.
오늘 날 한국 교회를 향한 비판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랑이 식었다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자기들 밖에 모르는 이기적 집단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비판에 대해서 내 자신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거나 늦추고,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가까이”라는 캠페인을 보면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가의 여부는 "상대방의 마음에 닿는 기술을 터득했는가? ” 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디서 이 기술을 배울 수 있을까? 우리 마음에 다가오는 신을 생각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최고의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이 가르쳐준 "마음에 도달하는 방법"을 배우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