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도 영
<예원예술대학교 교양학부장/ 본사 자문위원>
무학대사의 권유에 따라 성수산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던 이성계는 별다른 감응이 없자 탐욕을 모두 벗어 던지고 다시 한번 맑은 계곡물에 목욕재계를 하고 3일간을 더 치성껏 기도를 드렸다.
그가 젋은 시절 무학을 만났을 적, 그 아늑한 터전에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오색구름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감돌았던 기억이 역력히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성계가 이런 기억을 되살리며 환희담 앞에 이르자 이날도 역시 안개 걷힌 말끔한 하늘 아래 지난날 자신이 치성을 마치고 정성껏 쌓았던 돌무더기가 이름 모를 들꽃에 쌓인 채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는 하늘을 올려다본 후 땅을 굽어보았다. 그때 맑은 하늘엔 오색구름이 팔공산 전체를 덮더니 한줄기 영롱한 빛이 지상으로 뻗히었다.
이성계는 상서로운 기운임을 직감하고 도선암에 뛰어 올랐다. 그러자 난데없이 오색구름이 갈라지면서 하늘에서부터 “앞으로 왕이 되리라.”는 더없이 맑은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아! 성수(聖壽) 만세! 아! 성수 만세! 대명천지 해동 땅에 높고 귀한 성수 만세!”가 들려왔다. 순간 그는 “아 저 빛! 이른 아침도 아닌데 꼭두새벽에 어둠을 가르는 저 밝은 새벽빛!”이라고 경탄하였다. 이곳의 산이름이 성수산인 것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새 왕조를 건국하라는 천명(天命)이었던 것이다.
이후 조선을 건국하고 임금으로 등극한 후에 이 암자의 이름을 하늘에서의 음성이 내 귀에 들렸다라는 의미의 ‘상이암’으로 고쳤다.
그리고 환희담에서 목욕하고 신선이 된 기분으로 “산도 맑고, 물도 맑고, 하늘도 맑구나”라고 외쳤던 상쾌하고 통쾌했던 기분을 떠올려 산청(山淸)·수청(水淸)·기청(氣淸)을 의미하는 삼청(三淸)이라 했고, 그 주위를 신선이 내린 곳이라 하여 ‘삼청동’이라 명명하였다.
그곳은 왕건이 목욕재계하고 고려를 열게 하였던 환희의 연못 ‘환희담(歡喜潭)’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어필각을 세워 그 안에 ‘삼청동’이라 쓴 입석비를 안치토록 하였다.
비각 옆에는 1922년에 세운 ‘조선 태조 고황제 어필 삼청동 비각 중수비’가 있다. 자연석을 받침으로 사용한 점이나 몸체에 별다른 장식을 가하지 않은 소박한 형태이다.
이렇듯 성수산 상이암은 고려와 조선의 태조가 왕이 될 것을 예언하는 소리를 들었기에 산 이름과 절 이름을 얻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자세한 전말이 『성수산 상이암 사적기(聖壽山 上耳庵 事跡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일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승 도선이 고려 태조 왕건과 함께 운수의 팔공산에 이르러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를 올리고 못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는데, 이때에 부처님의 영험을 얻어 기쁜 마음으로 이 못을 환희담(歡喜潭)이라 하여 돌에 새겼고 암자의 이름도 도선암이라 하여 도선이 창건한 것"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 태조 고황제께서도 기이한 꿈을 꾸고 이 암자에 있는 승 무학을 찾아서 해몽하고 그의 인도로 이 산에서 기도하고 또 못에서 목욕하였는데 홀연히 이상한 길조를 얻어 삼청동(三淸洞)이라는 각자를 하였다.
또 공중에서 “성수 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태조가 임금이 되리라는 예시였다. 그 후 태조가 보위에 오르자 팔공산을 성수산이라 하고 도선암을 상이암으로 고쳐 불렀다. 그 뜻은 성수 만세라는 소리가 진실로 상의 귀에까지 들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산에는 고려 태조와 조선 태조가 머물렀던 곳이므로 일초, 일목도 차마 밸 수 없다. 하물며 돌 위에 새긴 각자가 일월과 더불어 다투며 휘황하고 또 산 이름과 암자 이름으로 그 사적이 소상히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으니 지금도 두 대왕이 계신 듯하다. 그러니 어찌 숙연한 공경심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이후 상이암은 구한말 호남의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정재 이석용(靜齋 李錫庸, 1878~1914)에 의해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왜병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958년 상이암 재건위원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경내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50호의 상이암 부도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4호로 지정된 부도가 있다.
한편, 성수면에는 이석용과 그를 따랐던 28명의 의사를 향사(享祀)하는 소충사(昭忠祠)가 있다.
상이암 뒷마당에 있는 부도는 각각 ‘해월당’, ‘두곡당’이라는 법호를 가진 두 승려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해월당 부도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3단의 받침 위로, 항아리 모양을 한 탑신의 몸돌을 두고 지붕돌을 얹었다. 받침돌에는 세련되지 못한 연꽃 무늬가 있고,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위로 살짝 들여있다.
꼭대기에는 밑부분이 깨진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놓여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두곡당’ 부도는 8각의 받침돌 위로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 장식을 앉은 구조로, 탑신에는 위아래에 넝쿨 무늬를 두어 장식하였다. 이 두 부도는 조선 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각 부분을 이루는 조각이나 제작한 솜씨가 섬세하면서도 뛰어나다.
(문화재청 자료(호남문화유산 이야기 여행, 2011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