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전북권에 진출한 가야세력 - 장수군 가야고분 ②

 김 도 영
예원예술대학교 교양학부장
본사 자문위원
 
고고학 자료와 고고지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금강 상류 지역에 기반을 두고 발전했던 가야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금강 상류 지역에서 발굴된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는 고령 지산동에서 중대형 고총이 본격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하면서 대가야의 영향력이 그 주변지역으로 파급되는 5세기 중엽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장수 삼고리에서 밝혀진 바로는, 그 상한이 5세기 중엽보다 얼마 간 앞설 것으로 추정된다.

장수 삼고리 유물들은 토기류의 조합상이 단순하면서 대가야 양식이 섞여있지 않고, 오직 이곳의 재지계만 출토되었다.

특히 장수 삼고리 1호분의 무개장경호는 합천 봉계리 제14호 토광묘, 5호분 유개장경호는 고령 지산동 고분과 합천 봉계리 제43호분이나 제10호 토광묘 출토품과 매우 흡사하다.

고령 지산동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에서는 그 시기가 대체로 5세기 이전으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에 금강 상류 지역에서는 대가야의 영향력이 미치기 이전부터 수혈식 석곽묘가 조영되었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가야계 분묘 유적의 발굴 조사에서 토기류의 조합상은 대체로 5세기 초엽에 대가야 양식이 등장하기 시작해 재지계와 혼재되다가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엽까지는 대가야 양식 토기가 많은 양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금강 상류 지역에 기반을 둔 가야는 6세기 초엽을 전후한 시기까지도 백제에 정치적으로 복속되지 않고 가야 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했을 개연성이 높다.

이러한 근거는 가야계 중대형 고총의 분포 양상과 그 발전 과정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금강의 최상류인 전북 장수군 일대에는 100여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밀집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고총들의 분포양 상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장계분지에는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에서 25기와 월강리에서 20여기, 계남면 호덕리에서 20여기와 화양리에서 1기 등 모두 60여기의 고총이 밀집해 있다.

그리고 장수분지에는 마봉산에서 장수읍 소재지까지 뻗은 산줄기와 북쪽으로 갈라진 지류의 중상부에 40여기와 팔공산 서남쪽 대성분지에도 5기 내외의 고총이 남아있다.

봉토의 규모 혹은 고총의 기수 등 외형적인 고고학 속성만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금강 상류 지역에서 장계분지는 가야계 최대의 중심집단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수 삼봉리와 동촌리에서도 가야계 중대형 고총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삼봉리는 봉토의 평면 형태가 동서로 긴 장타원형으로 북족에 인접된 고총과는 일정한 간격을 두었으며, 봉토의 가장자리에서는 호석을 두른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봉토의 중앙에는 주석곽이 자리하고 동남쪽과 서남쪽에 한 기씩의 순장곽이 배치된 다곽식이며, 이 순장곽들 사이에서는 장란형 토기 내부에서 고배형기대편이 수습되었다.

무엇보다 삼봉리 주석곽에서 위세품인 환두대도가 부장된 흔적과 목관에 사용됐던 꺽쇠가 출토되어, 이 고총들의 피장자가 가야의 지배자인 수장층으로 추정된다.

동촌리는 외형상 봉토의 규모가 가장 작은 3기의 고총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유구의 속성을 대체로 장수 삼봉리와 흡사했다. 즉 산줄기의 정상부를 인위적으로 구획한 다음, 봉토의 중앙에 자리한 주석곽을 에워싸듯 1~3기씩의 순장곽이 배치된 다곽식이다.

그리고 봉토의 평면 형태가 동서로 긴 장타원형으로 그 가장자리에는 호석을 두른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봉토의 평면 형태 및 호석 시설을 두르지 않은 유구의 속성에서 대가야와 다른 금강 상류 지역의 강한 지역성 혹은 독자성이 입증되어 2019년 10월 1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52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 자료(호남문화유산 이야기 여행, 2011년) 참조.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