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은 영
<늘사랑교회 목사/ 소통과공감 심리상담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는 오래전부터 이야기이다. 그만큼 인간은 혼자 살기가 매우 어려워 집단을 이루고 살아야 하며 집단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삶을 위한 인류공존을 위하여 여러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 삶을 위한 공존이 더디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사는 집단으로 이주한다든지 아니면 상대적 우월감을 내세워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빼앗거나 평화스럽게 물물교환으로 해결하는 것이 인류생존에 관한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사실상 의식주가 삶의 대부분이고 그중에서도 먹은 것이 최고로 치부되는 시절이었기에 식량자원의 확보는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필요충분조건에 따라 식량자원을 확보했을 때는 거기에 걸맞은 각종 행위가 있었다.
상시적인 평화 시대에는 대부분의 부족이나 국가에서는 식량을 받게 되는 추수 일을 기준으로 감사의 축제를 열거나 아니면 정기적으로 이러한 축일 내세워 일상의 삶을 영위하곤 하였다. 이러한 삶의 방식에는 사실상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소통하는 것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떤 경우를 보면 만남이 불편할 수도 있다. 만남이라는 것은 개인 간의 만남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국가의 대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고대 및 중세에는 나라에서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만났다가 잘 풀린 일도 있고 때로는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는 나라와 나라가 만나는 거창한 것이 아닌 작은 만남이지만 우리의 생활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과 일상의 우연한 만남에 주목해 본다.
사실 아무런 관련도 없이 어느 상점을 이용한 것에 불과한데 그 상점을 이용했던 다른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퍼뜨려 이용자가 자신도 모르게 확진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참 어처구니없지만 요즈음 이러한 무차별 감염이 본의 아니게 전파되고 있다.
더불어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피해를 당하는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고 하면 이 얼마나 불행한 현실이라는 것인가? 한술 더해 코로나19에 확진 또는 감염 검사를 위해 당사자를 방문해서 권고하면 방역을 훼방하는 등 자기의 잣대로 평가하면서 되려 상대방에서 손해를 끼치는 내용을 종종 언론에서 보았다.
평화롭고 즐거운 만남은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준다. 하루가 저물면서 내일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청초함은 설렘의 근원이 되면서 행복한 엔돌핀이 마음속에 젖어 들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만남을 통해 소통하는 즐거움을 인생의 희와 낙을 가져다주는 매개체이다.
수많은 사람이 하루의 일상을 겪으면서 많은 만남을 가진다. 계획된 만남이 있을 것이며 우연히 합석하는 만남이 있을 것이고 자신이 필요로 해서 당도했던 곳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등 인생은 만남의 영속성을 가진다.
우리는 가장 친근한 가족의 범위를 친척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친척이라는 의미는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만남으로 인해 끈끈한 정이 오가는 관계라는 의미이다. 예전에 대가족 관계에서 친척은 우리나라 생활의 관계를 설정해 주는 아주 필요한 가족 단위의 의미였다.
그런데 현대생활에서는 이러한 친척이라는 의미가 이제는 생물학적인 유전의 가치 이외에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부분 소가족제도에서 이제는 혼자만의 독립적인 세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기왕지사 개인적인 활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만큼 예전처럼 친척 간의 만남이 그리 소중하지 않게 여겨진다.
오죽이나 하면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더 가깝다는 표현이 있었겠는가? 이처럼 만남은 소중하면서도 소통을 통한 공유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즐겁고 행복한 만남으로 기억하는 일상의 생활이 불현듯 어느 특정한 부류의 집단이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보는 상상은 엄청난 고통이 수반될 것이다.
오늘도 만남은 지속된다. 누군가와 함께 즐겁고 행복한 만남을 가진다는 것은 축복일 수 있다. 불편한 만남이 아닌 행복으로의 초대를 생각하는 만남이 오늘과 내일 그리고 지속가능한 미래로 향하는 기쁨이 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