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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홍 성 근
 <전, 동북초등학교 교장>
 
어린 시절 위 제목의 글귀를 암송한 일이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푸시킨의 시인데 그는 자유로운 시적 상상력과 함께 감성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많이 남긴 낭만주의 시인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푸시킨은 한때 유배 생활을 하면서 인간의 본질과 삶에 대한 긍정에 대해 깊이 천착하게 되었고 언제나 불행과 죽음이 닥칠 수 있으며 그것이 지나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삶의 이치를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푸시킨은 위 시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시의 제목은 아주 자극적인 것으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고 하면서 매우 감성적이지만 현실의 상황에 대한 자신의 운명론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기도 하다.

인류가 공존하는 생활이 고대 이후 중세와 현대를 거치면서 위 말의 의미가 매우 가깝게 우리 곁에 다가온다. 사실은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가 모여 살면서 관계에 의한 사람들이 서로 속이고 속고 하는 것이 아닐까?

요즈음은 특히 코로나19로 인하여 그야말로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질병이지만 눈으로 보이는 것처럼 해서 반드시 마스크를 써야 하는 불편이 바로 우리를 속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사물이라고 하면 있는 그대로 할 텐데 보이지 않는 물질에 의한 질별의 감염이 바로 우리를 속이는 함정의 늪에 빠뜨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류는 탄생 이후 지구촌 모든 지역에서 진화를 거듭해 왔다.

생물학적인 진화와 함께 이동하면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조직을 갖추고 그 조직 속에 부족이라는 명제와 부족을 넘어 국가라는 틀이 존재하게 되었고 지금은 국가라는 틀을 넘어 지구촌이 한 가족이 되는 묶음 공동체가 되었다.

물론 일부에서는 아직도 사상과 이념에 따라 분쟁이 발생하고 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평화로운 대화나 타협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을 불사할 정도의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밟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분쟁의 속설에는 바로 상대방을 속이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욕망을 채우는 경우가 참 많다. 국가 간 분쟁이나 부족 간의 분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주변 이웃과의 분쟁을 수시로 겪는다.

이해관계가 선행되면서 삶의 중심에서 수많은 속임수가 난무하고 그 속임수가 결국은 나 자신에게도 올 수 있음을 안다. 누군들 속임을 당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위에 의한 속임수가 발생하여 감쪽같이 넘어가는 경우가 참 많다.

지금도 속임수의 대명사라고 하면 보이스피싱이라고 해서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속임을 당했다고 표현할 정도가 아니다. 나도 보이스피싱과 통화를 해 봤지만 정말 속임의 극치를 이루는 사람들이 있어 정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하는 명제에 분통을 터뜨리게 된다.

어쩌다 속임수에 넘어갔지만 삶은 우리에게 진리를 통한 진실만을 행하게 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삶을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절망적 분노에 휩싸여 삶에 대한 근원적인 가치에 실망을 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위 제목의 뒷 소절을 보면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화내지마. 슬픈 날들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들 오리니 ’ 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정말 오늘의 슬픈 현실이 있어서 삶이 나 자신을 속일 것 같지만 후에 참고 견디면 기쁘고 행복한 날이 온다는 기대감 어린 사실적 시구가 떠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참고 인내하는 법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하겠다. 코로나19로 지구의 모든 삶이 우리 모두를 속이고 있다고 가정하지만 이제 다시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그날을 기약하며 오늘도 힘찬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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