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석 규
<전북예총 수석부회장/ 전북음악협회 회장>
누구나 산에 올라가면 소리쳐 외칠 때 메아리가 울려 퍼진다. 왜 사람들은 정상에 올라 소리를 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는데 자연의 경치에 만족하면서 자신이 어렵게 산에 올랐다는 성취감으로 이렇게 소리쳐 외치는 것 같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성장한 매미도 소위 짝을 찾기 위해 맴맴 하는 소리가 귓전을 가른다. 너무 시끄러워 공해라고 할 만큼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라고 치부하기에는 생활 소음으로 인한 불편이 있다.
대부분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매미들의 짝짓기가 시작되면서 울리는 소리다. 자연적인 생태환경에서 이루어지는 메아리이지만 도시 근교의 발달한 환경에서 외쳐대는 매미 소리는 이제는 필요 이상의 소음공해가 되어 가는 느낌이다.
물론 사람이 매미 둥지에 관하여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매미들이 달라붙는 나무의 환경이 변했기도 하거니와 도시의 환한 불빛이 매미들의 습성을 변화시켰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반면에 가을의 정취는 아름다운 노랫가락과 어울림이 있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화일 것이다.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이를 밟고 지나갔던 추억의 풍경이 외치는 메아리가 아닌 삶의 애환을 반추해보는 메아리로 들릴 것이기에 가을의 메아리는 매우 인상적이다.
가을의 정취에 어울리는 노랫가락을 우리 선조들은 양반들의 노래라 하여 시조를 읊어대면서 낭만을 구가했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사실상 판소리는 서민들의 음악이라고 하고 시조는 품위 있는 양반들의 노랫가락이라고 하여 구분 지었던 옛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전통 가락에 의한 것이었고 서양음악에서는 일찍이 발달한 민주주의 평등사회에 힘입어 일반적인 대중음악 형식의 포크송이 메아리를 울리게 했고 이후 전문적인 음악가들로 구분되는 교향곡을 비롯한 오페라 등이 귀족문화의 음악을 통한 메아리가 펼쳐지게 하였다.
아무튼 자연의 소리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늦여름과 초가을의 매미 소리와 함께 설렘을 안고 기다려지는 것이 바로 감성 어린 선율의 메아리이다. 통상적으로 가을철의 각종 메아리는 아름다움을 본으로 삼고 있는 음악의 멜로디가 메아리 선율로 우리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 준다.
가을의 곡식이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 주듯 정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음악의 선율은 마음속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매번 다시 울려 퍼지는 메아리와 같은 것일 수 있다. 이런 인위적인 멜로디의 익숙함 속에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가을에 들려주는 메아리가 단지 음악적인 선율만이 아닌 다른 환경에서의 울림도 매우 시사적일 수 있다. 우리 생활에 힘을 북돋아 주는 각종 볼거리 역시 소리의 음률에 따른 메아리처럼 다시 보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돌고 돌아본다.
이 메아리는 단순하게 다시 들려오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 생활의 중심에 자리 잡는 환희의 메아리일 것이다. 우리 생활이 매우 어렵고 한편으로는 고뇌와 실의에 빠져 있을지라도 기쁨을 가진 메아리가 떠나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다면 생활 만족도의 일순위가 될 것이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 특히 도시 근교의 가로수 옆을 지나로라면 아직도 매미 소리가 가로수와 연계된 끝자락까지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생존본능에 의한 매미 소리가 이 가을에 인간생존의 본능으로 여겨져 선율의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지금 가을의 풍성함을 느끼기 위해 준비되었던 아름다운 선율의 대축제가 코로나19로 대부분 취소되거나 연기되고 있다. 안타깝지만 방역을 위한 것으로 선율의 아름다움을 느끼려는 우리에게도 무척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다.
하지만 어찌하오리!
대세가 이리하여 이 가을의 아름다운 메아리를 현장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여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는 지난날 가을을 그리며 밀려오는 메아리의 선율들을 생각해 보면서 내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