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 성 근
<전, 동북초등학교 교장>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였던가? 일생의 기간이 지금은 백세시대라고 하여 수명이 매우 길어졌다. 옛날에는 60세를 넘어서 축하의 행사로 회갑을 치렀으니 그만큼 수명이 짧았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명이 선진국에 발맞춰 100세 시대를 바라보며 매우 길어졌는데 그것은 건강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도 있고 또한 식생활의 변화에 따른 영양의 충분한 공급과 건강을 위한 운동 등이 병행해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으니 적당한 시간이 되면 우리는 모두 현세를 뒤로하는 이승의 추억을 되새기며 저승으로 간다. 어머니의 몸을 빌려 태어났고 세상을 떠날 때는 태어난 순서와 상관없이 순서를 지키지 않는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만남의 소중함을 기억한다. 물론 인간적인 천부의 인권으로서 부모님과 만남이 처음이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치를 깨닫고부터 만나는 것이 사실상 우리 본인의 의사에 따라 만남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있어서 인간은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 살 수밖에 없고 혼자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무인도에서의 생활이 평생 가능한 것이 아닌 것도 사람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면서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이치를 깨닫는 진정한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 한편으로는 자연스럽게 헤어짐이 사작된다. 만남이 인위적이라면 헤어짐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끝에 가면 다시 해어진 자연과의 재회가 시작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만남을 통해서 변화되어 일생의 전환기에 최고의 삶을 누리는 사람들을 본다. 이에 반해 어떤 사람들은 만남이 잘못되었는지 악연이 되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평생동안 만남을 부담으로 느끼며 살아간다.
망각의 뇌 구조가 있기에 망정이기 그렇지 않다면 악연에 의해 당사자는 지금 말하는 조현병에 걸려 미치고 환장할 것이다. 이처럼 만남에 있어 일생을 변화시키는 좋은 만남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이고 복인지 모른다.
일생에서 첫 번째 만남이 천부적인 부모님과 만남이라고 보면 두 번째 만남은 남녀 간의 혼인이다. 부부로 맺어지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것으로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성스럽고 고귀한 두 번째의 만남이 바로 부부로 인연을 맺는 만남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두 번째의 만남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참 많다. 지금은 보통 40%의 부부가 만남을 절연하고 헤어지고 있고 다른 두 번째의 만남으로 주행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세 번, 네 번으로 두 번째의 만남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두 번째의 만남이야 인위적으로 설정되어 만남이 원활하지 않으면 헤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네 주변 이웃들의 예 이야기는 두 번째 만남을 숙명으로 살고 미우나 고우나 해로했었다. 생활 속에서는 부딪힌 경우가 있어서 오락 프로그램에서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서로 낱말을 알아맞히는 퀴즈에서 천생연분을 ” 당신과 내가 오랫동안 사랑하면서 함께 했었던 말은? “ 하고 물어보니 할머니 대답이 ‘웬수’ 라고 하지 할아버지가 ”아니, 네 글자로!“ 하니까 할머니가 ”천생연분“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평생웬수“라고 하여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있는 것은 이처럼 두 번째의 인위적인 만남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제 인생에서 세 번째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결국 다음 세계의 만남이면서 현세의 이별을 뜻한다. 이승에서의 이별이 저승이 아닌 다음 세계의 만남으로 이어지니 이승에서는 아쉽지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순환하는 인생의 법칙이 될 것이다.
종교에서는 다음 생애를 천당과 지옥으로 나뉘는 이분법이지만 사후세계보다는 이승에서의 즐겁고 행복한 만남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 삶의 즐거움을 나타낸다. 즐거운 만남으로 오늘 하루도 뜻깊게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