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은 영
<늘사랑교회 목사/ 소통과공감 심리상담사>
일반적인 말로 보이는 것은 눈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마음이라고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사실 세상을 보는 눈이 전혀 불편하지 않을 수 있다. 원래 보이지 않았기에 그렇게 세상에 적응해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잠깐이라도 세상을 보았던 눈이라고 하면 이후 시각장애인이 되었을 때 그 불편함과 참담함이란 이루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각자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에 따라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큰일일 수도 있다. 세상이 변해가는 일상의 현실에서는 차라리 보는 것이 괴로운 것도 있기 때문이다.
옛 이야기 중에 눈먼 소년의 연날리기가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눈먼 소년이 연을 날리는 것을 보고 물었다. “애야, 넌 눈이 보이지 않는데 연이 하늘에 있는지 땅에 떨어졌는지 어떻게 알고 연을 날리고 있느냐?”하고 물었는데 그 소년은 대답하기를 “볼 수는 없지만, 이 연줄이 팽팽하게 있는 것을 보면 하늘에 연이 떠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보이는 사람에게는 신기했지만 보이지 않는 아이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눈은 비록 보이지 않을지언정 그가 가진 오감을 체험하여 느낌으로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빠르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눈 이외의 다른 감각기관이 발달하여 있어서 주변에 있는 각종 사물에 대한 짐작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 넓다고 한다. 하지만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범주 안에는 미치지 못할 수 있기에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다.
그런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의미는 남다르다. 보이는 사람들의 잘못된 행위를 눈으로 볼 때면 피가 거꾸로 솟아오를 때가 있고 행동으로 옮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보이는 가치를 스스로가 기준으로 설정할 때 그것이 정의로 생각할 수 있어 매우 고무적인 사회성에 대한 긍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보이는 가치에 부정적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복잡한 단면 속에 이기주의적인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자신만이 최고라는 것을 나타내면서 상대방을 비하하고 있는 것을 보면 ‘ 볼썽사납다’라는 표현을 쓴다. 보는 것이 가치가 없다는 말로 들린다.
우리는 순간순간 눈을 감는다. 물론 저녁 잠자리에 들면 눈을 감게 되고 생물학적인 숨만 오고 가면서 정신은 멈추게 된다. 잠의 와중에 꿈을 꾸는 것도 있지만 일단 눈을 감으면 모든 활동이 멈추게 된다.
눈을 감게 되면 빈부의 격차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처음 세상을 태어나는 심정으로 일명 포맷되어 사람의 기본으로 돌아간다. 복잡하고 다난한 삶이지만 이렇게 눈을 감으면 세상의 모든 이치와 생각을 다 잊어버리게 된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본래 주어진 신체의 발육에 따라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눈이 보이지 않게 되고 또 영영 보이지 않는 눈이 된다면 그때 가서야 눈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신체적인 눈만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이 쉽게 다가오고 접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함께 있을 때는 그 소중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사회구성원의 집단 중에 어느 한 사람이 빠졌을 때 그가 보였을 때의 소중함이 너무 큰 빈자리로 남아 아쉬움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다. 상대적이지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말 그대로 백지 한장 차이도 아닐 수 있기에 지금부터라도 보이는 환경에서 좀 더 신중하면서 생활의 의미에 가장 알맞은 언행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