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의 생명은 ‘균형’이다. 균형의 핵심은 ‘중심’이다. 중심의 ‘中’이란~, “不偏不倚無過不及-불편불의무과불급”이다.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아니하고,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 법의 잣대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에 기준과 적용이 동일해야 한다. 화살이 과녁에 ‘的中’하듯 ‘時’와 ‘處’에 합당해야 온전한 저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저울은 공정한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손에 ‘칼’만을 쥐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로마 시대에 들어와 정의의 여신상에 ‘칼’과 함께 ‘저울’이 등장하였다. 정의를 구현하는 데 있어 권력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공정성과 공평성을 상징하는 ‘저울’을 여신에게 준 것이다. 그 후 15세기 말에 이르러 ‘칼’과 ‘저울’에 더하여 여신의 눈에 ‘눈가리개(眼帶)’를 부착하였다. 이는 정의의 여신이 사적 감정과 편견을 배제한 채, 오직 공정하고 균형 있는 판결만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으며, 눈가리개가 없는 한복차림의 모습이다. 여신상을 제작하였던 조각가 박충흠 작가에 의하면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서구적 이미지의 여신을 한국적인 느낌으로 재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이 여신상은 ‘두 눈을 부릅뜨고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한다’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한다. 서구의 ‘정의의 여신상’이 ‘칼’을 든 것은 정의의 실현을 의미하며, ‘눈’을 가린 것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하여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 공정한 재판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하여 우리의 여신상은 ‘칼’을 없애고 ‘법전’을 든 것과 ‘안대’를 벗긴 눈을 뜬 여신의 모습이다. 과연 우리의 정의의 여신은 자신의 사적 감정과 편견을 온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또한 법 집행자들의 법 만능주의를 주장하는 리갈 마인드한 인식의 사유가 법 이면에 처한 약자의 눈물을 닦아 줄 도량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하는 노파심과 함께 법률 지배자들의 논리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우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세계 어디에도 정의의 여신이 앉아 있는 경우는 없다. 서구의 정의의 여신은 분연히 일어나 불의를 처단하며 인간사회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는 이미지인 반면 우리의 여신상은 높은 보좌 위에 앉아 인간 세상에서 억울함을 호소해 올 때 비로소 법전을 찾아보고 저울질하겠다는 권위주의 형 이미지이다. 여전히 신은 높고 법은 멀게만 느껴지는 형상이다. 나는 이 조형물에서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법을 빙자한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관예우’ 등의 단어가 연상된다. ‘법치주의’는 국민이 법을 잘 지키도록 준법을 강요하는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을 위임받은 위정자들이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법’과 ‘원칙’에 입각해서 국정을 운영하라는 제도이다. 윤석열 정부는 총장 시절 자신이 행하였던 것처럼 모든 임명 공직자에게 ‘조국 전 장관’을 표준 삼아 동일한 잣대로 적용하여 모범을 보이기를 바란다. /박황희(고전 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