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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 문재인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노무현’은 중과부적의 상태였지만 기득권에 대항하여 단기필마로 홀로 싸웠다.

그 결과 모든 책임을 자신이 혼자 뒤집어썼다. 지지율은 추락하였고 측근은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였으며, 동지는 분열하였고 자신은 임기 중에 국민적 공분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는 비난하기보다는 마땅히 지지했어야 옳았다.

‘문재인’은 180석의 전례 없는 가공할 화력을 가졌지만 싸우지 않고 관망하였다.

그 결과 어떠한 책임에서도 자신은 자유로웠다. 지지율은 유지되었고 측근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부하는 배신자가 속출하였어도 자신은 젠틀한 신사로서의 이미지를 굳혔다.

이때는 지지하기보다는 마땅히 비판했어야 옳았다.

나는 축구나 야구를 매우 좋아하지만 ‘구단’보다는 ‘선수’를 좋아할 뿐이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정당보다는 정치인 개인을 선호한다. 한국 정치의 기형적 구조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인지라 굳이 정파를 구분하자면 ‘간헐적 민주당 지지자’ 정도쯤 되겠다. 그러나 심정적 지지로라도 적(籍)을 두지 않고 한사코 한발 물러서려는 이유는 시대와 역사를 읽는 객관적 균형감을 잃지 않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나훈아를 좋아한다고 해서 나훈아는 ‘의인’이고 남진은 ‘악인’이다.’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자신의 음악적 취향이 나훈아 풍을 선호하는 것일 뿐이지 아무리 열성적 사생팬일지라도 그들의 인생을 선악으로 규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자신의 주관적 감정의 ‘호오(好惡)’가 ‘정의’와 ‘불의’의 기준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영논리의 폐단은 우리 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무조건 나쁘다는 ‘묻지 마’ 식 팬덤 정치로 변질되고 만다는 데 있다. 자신의 진영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판이나 직언도 용납지 않으면서 상대 진영에는 무차별적 증오와 적개심만을 부추긴다. 이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후퇴시킬 뿐만 아니라 독선적 사고를 증폭시켜 정치적 홍위병을 양산해 내는 야만의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정치인을 우상화하고 스스로 팬덤 정치에 종노릇 하는 맹목적 지지자들의 행태 또한 자신의 정신세계가 식민지 노예근성에서 해방되지 못하였음을 스스로 반증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과거 우리 사회는 ‘지역감정’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였다면, 오늘날은 ‘진영논리’가 서로에게 분노와 증오를 유발하여 대결구조를 심화시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든 ‘국민의 힘’이든 정치인의 진영논리는 자신들의 기득권 논리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들의 진영논리에 길들어진 충견이 되고 싶지 않다. 그들의 권력 욕망에 들러리나 서는 맹목적 추종자가 아니라 주권자로서 양 진영 모두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민주주의의 파수꾼이 되고 싶은 것이다.

문재인 보유국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대·깨·문’이나 독재자 박정희를 신격화하는 ‘태극기 모독부대’는 둘 다 독선의 도그마에 빠져 자신의 시각이 균형을 잃고 편견에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수준이다.

자신의 주관적 감정인 ‘호오(好惡)’의 기준과 객관적 윤리인 ‘선악(善惡)’의 기준을 이원화해내지 못하는 그들의 논리적 사고의 무지는 때로 타인을 비방하고 악마화하는 흉기로 둔갑하기 일쑤이다. 더구나 이 무지가 신념을 갖게 되면 그땐 ‘확증 편향적 맹목적 지지’로 발전하여 반드시 반사회적 재앙으로 귀결되고 만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사회에서 정치인은 결코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감시’와 ‘비판’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주권자인 민주시민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은 공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인은 인기와 지지율에 영합하기보다는 주권자의 역사적 평가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며, 마땅히 이미지가 아닌 ‘성과’로서 존중받아야 하고 ‘결과’로서 평가받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눈을 믿는 자는 결단코 성불할 수 없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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