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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와 수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칼럼



‘구라’의 사전적 의미는 ‘거짓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의 어원은 출처가 매우 불분명하다. 국립국어원에서조차도 우리말인지 일본어인지 한자어인지에 대한 공식적 입장 표명이 없다. 여전히 학계에서 논란의 여지가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일본말 ‘구라마스(暗ます; 속이다)’에서 온 말이라고 하는 주장과 가짜를 의미하는 ‘사쿠라’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설득력은 다소 떨어져 보인다.

구라를 한자로 표현한 말 중에는 ‘口羅’와 ‘口喇’라는 표현이 있는데, 입으로 하는 언어를 ‘비단(羅)’이나 ‘나팔(喇)’에 비유한 매우 독특한 발상이다.
‘口羅’라는 표현은 ‘입으로 하는 말이 비단 같다’라는 의미이며, ‘口喇’라는 표현은 ‘입으로 나팔을 분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


어떤 표현이 정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구라’라는 표현이 어느덧 ‘거짓말’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 또는 ‘이야기꾼’ 등의 의미로 확장된 듯하다.

‘구라’의 진화가 ‘Story-Telling’ 등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면 단연 최고의 구라쟁이는 「史記」를 쓴 사마천이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쓴 호메로스 등이 동서양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구라쟁이들 일 것이다.

이른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3대 구라’가 누구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 ‘조선의 3대 구라’는 작가 황석영과 재야운동가 백기완, 경복궁의 수문장을 지낸 전설의 주먹 일명 방배추(방동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느 날 인사동 술집에서 누군가가 “구라로 치면 이어령과 김용옥, 유홍준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그럼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라고 묻자 곧바로 방배추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야야, 걔들은 ‘교육 방송용’이잖아”

그야말로 재야의 고수답게 한방에 논쟁을 진압한 것이다. 그로부터 이들 3인을 ‘조선 재야의 3대 구라’로 일컫게 되었다.

수년 전에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구라쟁이 세분을 개별적으로 함께할 기회가 있어서 나름대로 면밀하게 분석해 보니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설교나 웅변조의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려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듯 대화 형식의 화법을 쓴다는 점이다.

둘째는 대화의 소재가 단순한 신변잡기에서 비롯된다고 할지라도 동서양의 고전을 아우르는 박학과 다식을 기반으로 하여 ‘감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셋째는 모두가 ‘10초 이상의 침묵은 방송사고’로 간주하리만치 어색한 침묵을 용납하지 않는 ‘多辯家’라는 점이다.

‘達辯’과 ‘多辯’의 상징으로 자리매김이 된 그들의 구라에는 언제나 ‘재미’와 ‘감동’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학습한 정보의 총량을 적절히 배합하는 탁월한 기술력으로 ‘時’와 ‘處’에 맞게 사용할 줄을 안다. 무엇보다 관중이 원하는 점을 신속히 파악하여 OEM 공법의 새로운 상품으로 재생산해낼 줄 아는 특출난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또한 좌중을 압도하는 리더십은 그야말로 압권이요 발군이다.

그러나 ‘말을 잘하는 것’과 ‘말이 많은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수다’의 사전적 의미는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이다.

‘구라쟁이’에게는 배울 것이 많지만 ‘수다쟁이’를 만나면 매우 피곤하다. 전혀 관심 없는 자신의 신변잡기나 일상사 등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어야 하는 곤혹스러움이 뒤따른다. 수다는 그야말로 소음이요 공해에 불과할 뿐이다.

수다쟁이의 특징은 상대의 반응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상대의 관심사나 인지능력, 공감 정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줄기차게 자신의 이야기만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상대의 발언을 끊기 일쑤이며 상대의 말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를 요즘 세상에서는 ‘TMT’(Too Much Talker)라고 한다.

‘TMT’의 속성은 대체로 자기애가 매우 강한 사람들이다. 타인이 궁금해하지 않는 내용조차도 굳이 자신이 먼저 나서서 필요 이상의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政治와 時事 등의 관심사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고 편협하게 반응하며, 편향에 찬 자신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수다쟁이의 또 다른 특징은 三思一言 하듯 생각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을 하면서 다른 줄거리를 계속해서 생산해 내는 스타일이라는 점이다. 그 때문에 주제가 일관성이 없고 언어가 종과 횡을 넘나들어 지나친 장광설을 나열하기 일쑤이다. 이런 ‘수다쟁이’나 ‘TMT’들이 간과하는 점은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들이 자신의 발언에 동의하였거나 감동하였을 거라고 하는 착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느 페북 친구의 ‘좋아요가 곧 동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라고 하는 프로필 문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구라’와 ‘수다’를 변별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일이 되겠는가마는 굳이 구라와 수다를 구별하여 구라쟁이의 달변은 배울 것이 있는 유쾌한 일로 여기고 수다쟁이의 다변은 분위기를 깨는 낭패요 민폐라고 여긴다면 이것이야말로 비단 나만의 착각인 걸까?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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