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가 말하였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조심성이 많아진 것일 뿐이다.”
나이를 먹어 조심성이 많아졌다는 것은 모험심이 상실되었다는 반증이며 모험심이 상실되었다는 것은 지적 호기심이 퇴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 연령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고의 깊이와 나이는 결코 정비례 하지 않는다. 인간의 성숙도는 그가 먹은 떡국의 그릇 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산 일자’에 따른 빈티지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 성찰’의 깊이에 따른 농도에 비례한다.
속언에 ‘常놈에겐 나이가 벼슬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백세시대’에 나이가 더 이상 벼슬이 될 수는 없다. 가난이 구제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나이 또한 ‘존중’과 ‘배려’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존경’과 ‘권위’의 상징이 될 수는 없다.
꼰대 철학은 자기의 ‘경험’을 중시한다. 소위 ‘라·떼’ 무용담에 도취 되어 관중규천(管中窺天), 군맹무상(群盲撫象) 하는 안목으로 세상에 대한 무한편견에 사로 잡혀있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분석하는 일에 나이브 해져서 자신의 경험만을 중시하며 도무지 변화를 수용할 줄 모른다.
맹자가 말하기를 “인생의 병통은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데 있다”[人之患在好爲人師]라고 했는데, 꼰대의 특징은 배우려 하지 않고 늘 남을 가르치려 든다는 데 있다. 꼰대는 자기의 경험과 직관을 우선시하여 오직 자신의 눈과 체험만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꼰대’는 성장이 멈춘 사람을 의미하고, ‘어른’은 성장의 동력이 멈추지 않은 연륜이 있는 인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꼰대가 반드시 나이 많은 늙은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적 호기심이 퇴화했거나 성장의 동력이 멈추어 인지 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수반하는 젊은 청춘 가운데도 꼰대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괴테는 말하기를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나이를 먹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실수를 범하려 할 때마다 그것은 전에 범했던 실수란 것을 깨닫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어른이 되기 위해서 나이는 ‘필수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란 말이다. 충분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실수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자신의 불완전성과 무지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을 때만이 비로소 성장하고 진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륜’과 ‘경륜’이란 경험과 지식의 축적으로 인한 ‘성찰’과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다. 한갓 정보와 지식의 습득만으로 지성인이 될 수 없듯 생물학적 연령의 축적만으로는 결코 어른이 될 수 없다. 인격적 성숙과 더불어 그가 구현한 삶의 가치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그를 ‘어른’이라고 대우할 수 있는 것이다.
늙음을 걱정해야 하는 시간이 내게도 도래한 듯싶다. 꼰대로 늙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고 젊은이들 비위 맞춰가며 시류에 영합하고 싶은 마음 또한 전혀 없다.
나는 나답게 ‘나’다운 어른으로 늙고 싶은데 당최 불안하다. 내재 된 ‘나’다운 모습이 아직도 삶에 모범적으로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적 욕망에 물든 자신을 벗어 버리고 경전 속의 어른을 거울삼아 그들을 내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진지하게 배우며 닮아가야 할 일이다.
알베르트 카뮈가 말하였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기보다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