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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찬 송덕비 – 自讚 頌德碑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칼럼





‘송덕비(頌德碑)’는 조선 시대에 임금의 명으로 각 고을의 감영이나 관아 등의 임지에서 정사를 돌보던 관찰사나 수령 가운데 재임 중에 특별한 공덕을 세운 사람을 위하여 관내의 백성들이 이를 기리고자 당대의 백성들에 의해 세워진 비석을 말한다. 송덕비에 이름을 남길만한 목민관의 자격으로는 청렴한 자세로 고을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여 뚜렷한 성과로서 백성에게 은택을 입힌 자라야 한다. 이 은택에 감읍한 고을의 백성들이 목민관에 대한 경의를 헌사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던 것이 바로 송덕비다.

송덕비의 별칭으로는 ‘공덕비(功德碑)’, ‘선정비(善政碑’), ‘거사비(去思碑)’, ‘유애비(遺愛碑)’, ‘불망비(不忘碑)’, ‘영사불망비(永思不忘碑)’, ‘정청비(政淸碑)’ 등이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유애비(遺愛碑)’는 지방의 관찰사나 고을의 수령 가운데 전쟁이나 재난을 당하여 위기 극복을 위해 헌신하다 ‘순절(殉節)’하거나 ‘전사(戰死)’하였던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비의 명칭이다.

송덕비 건립은 고을의 감영이나 관아 등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고을을 위해 정무적, 재정적으로 헌신하였거나, 백성들의 고충과 분쟁을 해결하였거나 전쟁이나 재난 시 백성들을 구호하며 적과 싸우다 순절하였거나 하는 등의 충의와 애민 정신이 모범적이었던 이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 공적에 대한 사실 여부를 조사하고 심의하여 실적이 사실일 경우 해당 목민관의 업적과 은택 등을 칭송하고자 당대의 백성들이 직접 세웠다.

부정부패 및 비리에 연루된 탐관오리이거나 재임 기간 내에 권한이나 임무 등을 소홀히 한 목민관의 경우는 송덕비를 세울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일부 무자격 목민관들은 자신의 업적을 스스로 치하하려는 욕심으로 재임 중에 자신의 재물을 들여서 백성들을 기만하고 위협한 뒤에 억지로 세웠던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암행어사의 감사 등으로 이러한 비리가 발각되면 현직에서 축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송덕비를 철거하거나 매장하였다.

퇴임한 전직 대통령은 1억3천만원 상당의 ‘무궁화대훈장’을 자신에게 수여할 것을 재가한 바 있다. 역대 모든 대통령이 관행으로 해왔다는 청와대 측 주장은 명분에 있어 매우 설득력이 떨어진다. “상훈법 10조에 의하여 서훈 추천을 받은 뒤 국무회의에 상정하여 대통령이 재가한다.”라고 하였지만 이는 전직 대통령의 공적을 후임 대통령이 평가하고 재가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신의 재임 기간의 공적을 본인이 스스로 평가하여 재가한다는 것은 한 편의 블랙 코미디와 같은 일이다.

이는 후진국 시절 독재자를 칭송하기 위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계승해야 할 가치가 있는 전통’이 아니라 ‘청산해야 할 부끄러운 유산’일 뿐이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낯부끄러운 일로서 후진국 독재자들이 통치 기간에 스스로 자신의 동상이나 공적비를 세우는 행위와 똑같은 추태이다. 21세기에 아프리카 어느 신생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로서 해외토픽에 나올만한 몰지각한 짓거리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간혹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을 쓰는 경우는 더러 있었다. 이 경우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검열하여 자신의 사후를 경계하려는 의도와 후대에까지 변함없는 자신의 의지를 전하고자 하는 신념에서였다. 그러나 행여 어떤 이가 ‘자찬 송덕비(自撰 頌德碑)’를 세웠다 한다면, 본인이 자체적으로 세운 것이 알려지게 되는 순간 그는 관료로서의 정치생명이 끝날 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에도 지울 수 없는 치욕적인 오명과 함께 지탄(指彈)과 설검(舌劍)의 수모를 감수하고 살아야만 했다.

하물며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노라며 ‘절차적 정당성’을 누누이 강조해온 전임 대통령이 이전 독재자들이 자행한 부끄러운 악습의 고리를 차마 끊어내지 못하고 말았다면, 그것은 전직들의 염치없는 밥상머리에 자신의 숟가락을 슬그머니 얹고자 하는 구차한 욕망의 발로일 뿐이다.

이는 마땅히 ‘후임 대통령’이나 지지자인 ‘국민’이 평가하고 시행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임기 중에 스스로 셀프 훈장을 수여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이 치른 시험을 감독관 없이 자신이 직접 채점하겠다는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일이다.

‘훈장’이 되었든 ‘송덕비’가 되었든 타인이 인정하고 공감하였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자신의 재임 중의 공로를 자신이 직접 치하하겠다는 것은 국민을 위해 ‘봉사’를 한 것이 아니라 ‘장사’를 한 것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이는 국민에 대한 예의도 도리도 아니다. 셀프 훈장의 제정 경위가 독재 시대의 부끄러운 유산임을 안다면 관행을 따르기보다는 양심의 길을 선택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만약 전임 대통령이 이를 단호히 거부하여 구태의연한 악습을 단절하였다면, 비록 ‘정치인 문재인’에게 정치적 비난은 가했을지 몰라도 ‘자연인 문재인’에게 인격적 비난은 함부로 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국민으로서 이일에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없다면, 우리 사회는 이미 ‘염치’나 ‘양심’ 따위를 내던져버린 채 ‘예의’와 ‘교양’이 실종된 비정한 시대를 살고 있음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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