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史記)" '추양열전(鄒陽列傳)' 에 이런 말이 있다.
“속담에 이르기를 ‘백발이 되도록 오래 만났어도 마치 처음 사귄 친구처럼 서먹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레를 멈추고 잠깐 만났어도 죽마고우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서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다.”
[諺曰, 白頭如新, 傾蓋如故, 何則, 知與不知也.]
‘백두(白頭)’란 흰머리를 뜻하는 말로써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오랫동안 알고 지냈음을 뜻하며, ‘경개(傾蓋)’란 수레를 멈추고 일산을 기울인다는 뜻으로 길가에서 잠깐 만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백두(白頭)’란 만난 지 오래된 사이를 말하고 ‘경개(傾蓋)’란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서로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차이의 문제는 둘 사이의 ‘추억의 공유’에 대한 물리적 시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것은 둘 사이의 ‘가치의 공유’에 대한 사상적 공감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백발이 되도록 오랜 만남 속에 일정 시간 서로에게 ‘추억’을 공유할 만한 ‘기억’이 있다 할지라도 ‘가치’를 공유할만한 ‘공감’이 없다면 그와의 관계는 결코 ‘안다.’라고 할 수 없다.
비록 수레를 멈추고 잠깐 대화를 나눈 사이일지라도 ‘지향하는 가치’가 서로 ‘공감’된다면 그와의 관계는 충분히 ‘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겨울 미국 여행을 하던 차에 생면부지의 ‘페·친’을 만나러 캐나다에 간 일이 있다. 그때 그 페·친의 소개로 어느 한인 부부댁을 잠시 방문하게 된 일이 있다. 후일 알게 된 일이지만 그분은 캐나다 모 대학을 정년 퇴임하신 분으로서 한국에서 총리를 지낸 분의 동서였다.
서로가 모두 생면부지의 초면인지라 매우 분위기가 어색하였는데, 이때 거실과 서재에 걸린 액자가 우리의 서먹한 적막을 깨트려 주었다. 그 액자의 내용은 그분의 증조부의 ‘교지’와 ‘시권’ 등으로서 문화재급 보물이었다.
알량한 전공 덕분에 한눈에 알아본 내가 잘난 척 설명을 해대자 분위기가 급격히 화기애애해졌고 내친김에 한국에 돌아가서 서재에 있는 다른 것들까지 모두 번역을 해주겠노라며 호기롭게 카메라에 담았다. 훗날 약속한 대로 한국에 돌아와 논문을 쓰듯 주석을 달아가며 자세히 번역을 해 드렸더니 증조부 유품의 비밀이 마침내 풀렸다며 너무나 기뻐하셨다.
우리 부부와 함께 미국과 캐나다 여행을 하자는 제안도 하셨는데, 급기야는 직접 한국에까지 오시어 오늘 극적인 상봉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기쁨을 어찌 다 형언할 수 있겠는가? 페북을 한 이후로 최고의 기쁨이었다.
천명을 알만한 나이가 되고 보니 ‘추억’을 공유한다고 해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가치’가 공유될 때에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마천은 〈자객열전(刺客列傳)〉에서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서 화장을 한다.”[士知己者死, 女悅己者容.]하였고, 당나라의 왕발(王勃)은 “이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이웃과 같이 가깝다”[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라고 하였으며, 왕안석(王安石)도 “인생의 즐거움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데 있다[人生樂在相知心]”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기를 친구의 첫째 조건은 ‘가치의 공유’에 있고, 둘째 조건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것이 되었든 지향하는 가치의 세계가 다르거나 배우고 따를 만한 그 무언가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쉽게 피로해지기 마련이다.
평생을 한동네에 살아도 얼굴 한번 못 보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나라 밖에 있어도 기어이 찾아가 만나는 친구도 있다. 친구와의 만남에 있어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식조차 설득해야만 할 정도의 사이라면 이미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거리나 시간의 제약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와는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
무엇보다 가장 불행한 친구의 조건은 추억을 담보로 의리를 구걸하며, 서로에게 반면교사가 되는 것이다. 이따금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고서 매우 낭패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일정 시간 추억의 공유가 있다고 해서 서로에게 공유의 지분 이상으로 많은 공백이 있었음을 망각한 채,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전제로 현재 상대의 인품이나 가치를 함부로 규율하거나 단정하려 든다면 결국엔 추억도 잃고 친구도 잃게 되는 법이다.
인생이란 끊임없이 친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내가 페북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디오게네스의 등불’ 같은 것이다.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의 수동적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가치 지향적 인간관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까닭은 사상적 교감과 정서적 연대가 가능하여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 고민의 교집합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친구를 만나 인생의 2막을 함께 하고픈 욕심 때문이다.
그는 사대부 양반 가문의 독립지사 후예답게, 정의와 신념이 투철한 열혈남아였다. 역사와 철학, 문학과 인생에 이르기까지 짧은 시간에 다양한 주제를 섭렵하며 많은 공감을 나누었다. 옛 사람이 말한 바와 같이 오늘 내가 그와 나눈 대화는 십 년의 독서보다 나았다.‘與君一夕話 勝讀十年書’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