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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詩仙) - 이백(李伯)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칼럼



-선주에 있는 ‘사조루’에서 교서랑인 숙부 이운(李雲)을 전별하며

나를 버리고 가버린 지난날은 머물게 할 수가 없고
내 마음 어지럽히는 오늘날은 번뇌와 근심이 많도다.
가을바람 만리에서 기러기를 보내오니
이들과 대작하며 높은 누각에서 즐거이 취하리로다.
그대의 문장은 '건안(建安)'의 기품을 갖추었고
나는 남조시대 ‘사조(射眺)’와 같이 청신하였네.
두 사람 모두 빼어난 흥취와 장대한 뜻을 드날리며
푸른 하늘에 올라 밝은 달을 잡으려 하였네.
칼을 빼어 물을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잔을 들어 시름을 삭여도 시름은 더욱 깊어지네.
인생살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내일 아침엔 속세 인연 버리고 조각배나 띄워볼거나.

[宣州謝眺樓餞別校書叔雲]
棄我去者, 昨日之日不可留.
亂我心者, 今日之日多煩憂. 
長風万里送秋雁, 對此可以酣高樓.
蓬萊文章建安骨, 中間小謝又淸發.
俱懷逸興壯思飛, 欲上靑天攬明月.
抽刀斷水水更流, 擧杯銷愁愁復愁.
人生在世不稱意, 明朝散髮弄扁舟.

고문서를 공부하다 초서로 쓴 이백의 시 한 수를 발견하였다. 우측 상단의 한석봉(韓石峯)이라는 표제(標題)는 성첩자가 후대에 가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석봉의 친필 인지의 여부는 단정할 수 없다.

자형의 미추나 선과 획을 통해 나타나는 조형미의 심미안적 담론은 안고수비(眼高手卑)한 처지이니 논외로 치부하더라도 문장이 주는 심오한 울림은 자못 의미심장하여 노졸(魯拙)한 내 마음을 위로하기에 충분하다.

글의 내용은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李伯)의 시이다. 이 시는 전별시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백이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을 얻지 못한 채 좌절과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내면의 이상과 현실의 모순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자신의 우울한 심사를 잘 드러낸 시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시선의 작품이라 칭할만한 불후의 절창이다.

이 시를 지었던 시기는 천보(天寶) 13년(753) 가을로서 안록산(安祿山)이 북방에서 모반을 꾀할 조짐으로 ‘난(亂)’의 전운이 감도는 국정이 혼란하던 시기였다. 당시 이백은 선주(宣州)에 머물렀는데 비서성 교서랑(校書郞)이었던 족숙(族叔) 이운(李雲)이 감찰어사의 신분으로 왔다가 일 처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명승지인 사조루(謝跳樓)에 올라 그를 전별하며 지은 시이다.

‘사조루’는 남조시대 사조가 선주 태수로 있을 때 지은 누각으로 ‘북루(北樓)’ 또는 ‘사공루(謝公樓)’로 불리었던 선주의 명소이다. 이 시의 다른 표제로는 ‘배시어숙화등루가(陪侍御叔華登樓歌)’라고 쓰여 있는 본도 있다. ‘숙운’이 아닌 ‘숙화’일 경우 이화(李華)의 약력에 견주어 살펴본다면 이백의 나이 대략 53세 때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수(二首)에서 ‘봉래(蓬萊)’는 궁중의 비서성(秘書省)을 비유한 말로써 숙부인 ‘이운’을 지칭하고, ‘소사(小謝)’는 남조시대의 사조(射眺)를 비유한 말로써 ‘이백’ 자신을 뜻한다.

‘산발(散髮)’은 단순히 머리를 풀어헤쳤다는 뜻이 아니라 벼슬아치의 머리 장식인 ‘잠(簪)’과 ‘영(纓)’을 벗었다는 의미로서 더 이상 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관료가 아닌 일반인의 경우에는 ‘세상과의 인연을 끊겠다[絶世]’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당나라 대문호였던 한유는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서 ‘불평즉명(不平則鳴)’이라 했다. ‘모든 사물은 평정을 얻지 못하면 소리를 낸다.’라고 했다. 운다는 것은 치우침이다. 인간은 감정의 물결에 치우치면 운다. 슬퍼서 울고, 기뻐서 울고, 허무해서 울고, 좋아서 울고, 그리워서 울고, 외로워서 운다. 운다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의 ‘울림’이다.

시인은 우는 사람이다. 시란 아름다운 ‘울음’이다. 오늘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공명(共鳴)’한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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