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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화의 산실 ‘운림산방’ – 雲林山房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칼럼



진도에 가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바로 ‘글씨’와 ‘그림’, ‘노래’가 그것이다. 이중 글씨와 그림은 모두 ‘운림산방(雲林山房)’에서 비롯되었는데,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기거하던 곳으로서 남종화의 산실로 일컬어 지고 있다.

그는 20대 후반에 해남의 ‘두륜산방’에서 초의선사에게서 지도를 받으며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고 그림을 공부하다 33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평생의 스승 ‘추사’를 만나게 되어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받아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한 삼절을 이루게 되었다.

중국 명·청 시대에는 남종화가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북종화’가 외형을 위주로 한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였다면 ‘남종화’는 작가의 내적 심경 즉 사의표출(寫意表出)에 중점을 두었던 화풍의 차이가 있다.

‘소치(小癡)’라는 아호는 스승인 김정희가 내려주었는데, 원나라 때 대가였던 ‘대치도인(大癡道人) 황공망(黃公望)’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으니 조선의 황공망이 되라고 하여 직접 지어준 것이다.

‘치(癡)’는 치매라고 할 때의 ‘치’자로서 어리석다는 말이다. 요즘은 지식이 병들었다는 의미로 ‘치(痴)’ 자로 쓰기도 한다. 옛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이나 호에 어리석다는 의미의 ‘우(愚)’ 자나 ‘치(癡)’ 자를 쓰는 것에는 대단한 반어적 의미가 담겨있다. ‘자신이 어리석은 자임을 크게 깨달았으니’ 이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현자임을 암시하는 의미도 담겨있는 셈이다.

추사는 소치의 화재를 두고 “압록강 동쪽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라고 극찬했다. 첨찰산(尖察山) 주위의 여러 봉우리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에 아침 안개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은 마치 소치가 그린 한 폭의 산수화를 떠올리게 한다. ‘운림산방’이란 당호가 바로 그러한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진도의 운림산방은 1대 ‘소치 허련’, 2대 ‘미산 허형’, 3대 ‘남농 허건’, 4대 ‘임전 허문’ 그리고 5대 ‘동원 허은’이 대를 잇고 있다. 일가 직계 5대에 이르는 가문의 화맥이 200여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다.

남도의 답사 1번지 해남과 진도를 오가면서 이충무공의 ‘벽파진 전첩비’와 명량해전의 성지인 울돌목의 물살을 굽어보고 천년 사찰 대흥사에 이어 3일째 되던 날 ‘보길도’를 향하여 가는 도중 돌발 변수가 생겨 회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너무나 아쉬웠다.

정작 서러운 것은 윤선도의 ‘세연정’과 ‘낙서재’를 볼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강제윤’ 님의 시상을 느낄 수 없었음이 너무나 슬프고 한스러웠다.

보길도 몽돌바닷가에 자연산 ‘전복’과 ‘미역’과 ‘막걸리’를 두고 가는 이 처절하고 쓰라린 심정이여~^^

“그러나 정작 슬픈 것은 이별이 아니다.
천 번의 이별이 두렵겠는가
이별이 아니다
서러운 것은 이별이 아니다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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