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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여친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칼럼



나의 중학생 시절 이야기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 펜팔이라는게 유행이었다. 통신이 낙후된 시절이라 편지를 쓰는 일이 일상사였다. 나는 영어를 배워볼 요량으로 스위스에 사는 어느 여학생과 국제 펜팔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며 내게도 집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처음 보는 컬러 사진 속의 그녀는 파란 눈의 금발 머리 소녀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낯설고 신기하였다.

흑백시절의 고단한 내게 카메라가 있을 리 만무하였고, 또한 단칸방 사는 누추한 모습을 차마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나는 참으로 엉뚱한 결심을 하고 말았다. 친구에게 카메라를 빌려 경복궁에 가서 사진을 찍고서 우리 집 정원이라고 사기를 치고 만 것이다.

그 철없는 거짓말이 화근이 되었다. 그녀는 너무나 기뻐하며 여름방학에 부모님이랑 반드시 한국에 놀러 오겠다고 답장이 온 것이다.

나는 엄청난 두려움과 황망함에 갑자기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둘러대며 서둘러 펜팔을 끊고 말았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철없던 시절의 그 스위스 소녀가 생각이 난다.

나는 지금 SNS를 통해 알게 된 묘령의 여인을 만나러 캐나다를 가고 있다. 그녀는 某 오케스트라 단원의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내가 아는 사실은 이것뿐이다.

사진과 이름은 여친의 사생활과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절대 공개하지 않을 예정이다. 더구나 독자 제현의 궁금증과 의혹의 증폭을 위해서라도 철저히 비밀에 부칠 것이다.

캐나다는 지금은 좋아졌지만 내가 방문한 지난 겨울은 락다운 상태여서 입국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더구나 갑자기 몰아닥친 한파로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진 상태이다. 여러 가지 악조건의 상황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나를 압박해왔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숨고 도망 다니던 그 옛날의 내가 아니었다.

정 목사 부부를 대동하고 대형차를 렌트하여 이 어려운 시기에 왕복 1,600마일의 모험을 기어이 강행한 것이다. 참으로 간난신고의 고생 끝에 마침내 입국이 허락되어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다.

처음 만난 그녀의 모습은 푸른 눈의 금발 머리는 아니었지만, 마치 소설 속 ‘윤 초시 증손녀’ 같은 청순가련한 소녀의 이미지였다. 사흘간의 꿈같은 시간을 넷이서 함께 보냈다. 내 인생에도 소설에나 나올 법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일찍이 내게 이렇게 행복한 날들이 있었더란 말인가?

내가 정말 이런 행복을 누려도 괜찮은 것이란 말인가?

온갖 의심과 의혹의 신문을 자신에게 반추하며, 나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러운 이 행복을 음미하였다.

평생을 변방의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내게 찾아온 이 믿기지 않은 행운이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하지만, 촌스러운 기쁨을 감출 수가 없다.

토론토 CN 타워가 문을 닫고, 나이아가라 폭포의 유람선이 운행을 중단하였어도 그저 즐겁기만 하였다.

내겐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정 목사 부부와 함께 그 때의 만남이 ‘귀한 인연’에서 ‘편한 친구’로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캐나다 여친이라고 해서 서양사람일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길요~

그냥 캐나다에 사는 한국 여친일 뿐입니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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