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단체의 종교 활동에 열정이 특심한 사람 가운데 대화가 매우 힘든 두 가지 유형의 열심 당원들이 있다.
첫째는 이른바 ‘직통 신자’형이다.
이들은 대체로 신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성령을 체험했다고 하는 부류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직관’과 ‘체험’을 매우 중시한다.
신이 죽을병에서 자신을 살려주었다거나 신의 은혜로 자신이 사고의 현장에서 기적을 체험했다고 하는 등의 유형이다. 자신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근심과 걱정이 없어지고 만사가 형통하게 되었으며 영의 눈이 열려서 천국 생활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간증이다.
그러나 대개는 성령 체험이 아닌 악령 체험일 확률이 높으며 성령 충만이 아닌 감정 충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들의 특징은 ‘오직 예수’, ‘절대 긍정’만을 강조한다. 인류의 집단지성을 통째로 거부하며 자신의 직관과 체험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독단의 도그마에 빠져든 대표적 유형이다.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에게 구전을 통한 직접 계시를 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아브라함이 BC 2166년생이요 야곱이 BC 1878년생이다. 동양의 역사로 보자면 문자가 없던 요순이나 단군과 같은 설화 시대의 전승일 뿐이다.
대체로 이단형 신자일수록 ‘직관’과 ‘체험’을 중시하기 마련이다. 만약 신께서 아직도 ‘직통 신자’를 필요로 하신다면 2천년 전 이 땅에 예수를 보낸 것은 신의 시행착오였음을 증명해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이 제정일치 시대의 무당임을 자임하는 유형이다.
둘째는 ‘문자주의 및 성경 무오류 신봉자’들이다.
한마디로 성경 맹신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성경 안에서 인생의 모든 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책 한 권 읽고 인생을 통달해버린 신념에 찬 자기기만의 인생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다.
성서가 기록된 일차적 이유는 그 시대 사람을 위해서이다. 그 시대의 필자들이 지금의 인류를 위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당시의 성서 기록자들이 지금의 우리가 비행기로 하늘을 날고 온라인으로 세계가 동시에 소통하는 유비쿼터스의 시대를 어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지금의 시대에 성서를 기록한다면 마땅히 동시대인을 위한 기록물이 되어야지 2천년 후 미래의 인류를 위한 유산으로 기록을 하겠는가?
성서는 어휘나 단어의 분석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역사 해석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경전이 그 시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존재 이유는 오직 예수의 ‘정신’에 있는 것이다. 문자의 착오나 기록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고 성경 무오류에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만약 문자의 해석이나 단어의 분석에만 집착하여 역사성과 시대사적 의미를 간과한다면 이스라엘에 존재하였던 인간 예수는 만날 수 있을지언정 지금 이 땅에 오신 부활의 예수는 결단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구현하고자 하는 ‘道’의 본령을 한마디로 정의하고자 한다면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즉 신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인도철학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道’의 본령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즉, 위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요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공경이나 도에 대한 깨달음은 궁극적 실제에 대한 각성이다. 이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겸손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행위가 바로 ‘이웃사랑’이요 ‘중생의 구제’로 발현되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신앙생활이거나 종교적 행위를 막론하고 위와 같은 경전의 본령을 구현해내지 못한다면 이는 자기 위안 또는 자기만족에 불과한 종교적 허상일 뿐이다.
공자가 일생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道’의 본령은 ‘하학인사 상달천리(下學人事 上達天理)’이다. 즉 아래로는 사람의 일을 배우고 위로는 하늘의 이치에 통달하는 것이다.
인간학을 배우지 않고 신학에 통달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인간관계의 회복 없이 신과의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는 구전 계시가 가능한 석기시대의 ‘직통 신자’이거나 제정일치 시대의 ‘무당’임을 스스로 자임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의 간증이나 설교가 희귀한 볼거리는 될지언정 그들의 언어는 공허한 메아리요 언제나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될 뿐이다.
두서없이 글을 쓰고 보니 두 부류 외에 한국교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다중의 교인을 생략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 다중의 교인이 곧 ‘종교 이익집단’ 또는 ‘기독노조원’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술적 신앙이나 의존적 신앙에 사로잡힌 기복주의자들이다. 아직 미토스의 세계에서 로고스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 기적과 복에 환장한 영적 샤머니스트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매우 비이성적 사고를 한다는 점이다. 상식적인 일조차 설득을 해야 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유형들이다. 이런 유형의 단체나 개인은 진리가 아닌 영리를 추구하는 종교 이권단체로서 ‘종교노조’나 ‘기독 조합원’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진리와 정의를 분별할 줄 모르는 종교적 금치산자들이다.
참으로 간과해서는 안 될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