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2월 27일.
다산은 살아 돌아올 기약조차 없는 머나먼 유배길에 올랐다. 무려 18년에 걸친 형극의 세월이었다. 셋째 형 약종은 참수형을 당했고 둘째 형 약전과 다산은 유배형에 처분되었다. 다산이 귀양 갈 당시 큰아들 학연은 19살이었고 작은 아들인 학유는 16살이었다. 다산의 귀양살이가 8년이 되던 해 강진 유배지로 그의 둘째 아들 학유(學游)가 23살 어른이 되어 찾아 왔다. 2년간 아버지 곁에서 학문과 인생을 배우며 저술 활동을 돕다가 마침내 강진을 떠나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산이 학유에게 노자 삼아 써준 가르침이다.
··· 前略 ···
“요컨대 알아야 한다. 아침에 햇볕을 받는 곳은 저녁에 그늘이 먼저 들고, 일찍 피는 꽃은 시듦 또한 빠르다. 운명의 수레는 돌고 돌아 잠시도 멈추는 법이 없다. 이 세상에 뜻을 둔 사람은 한때의 좌절로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한 마리 가을 독수리가 하늘을 솟아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 눈으로는 세상을 작게 보고, 손으로는 우주를 가볍게 여겨야 한다. 이것이 옳은 것이다.”
男子漢胸中, 常有一副秋隼騰霄之氣. 眼小乾坤, 掌輕宇宙. 斯可已也.
- 신학유가계-贐學游家誡 중에서
‘眼小乾坤, 掌輕宇宙.’
‘눈으로는 세상을 작게 보고 손으로는 우주를 가볍게 여겨야 한다.’
멸문지화를 당해 비록 폐족의 신분이 되었지만, 다산은 결코 그의 기상과 신념을 꺾지 않았다. 내가 처음 고전을 공부하겠다고 다닐 때부터 노트 첫 장에 써두었던 글이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금쪽같이 귀한 가르침이다.
매 수업시간 마다 빠지지 않고 질문을 하던 지적 호기심이 매우 왕성하던 한 학생이 메일로 질문을 보내 왔다.
‘대몽수선각 - 大夢誰先覺’의 번역이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았지만, 번역이 각기 달라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시는 짓기보다 해석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知詩之難甚於作詩之難] 시의 바른 번역을 위해서는 화자의 시적 환경과 시대 상황 등을 파악하고 분위기와 흐름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시는 어떤 형태로 해석을 하든 의미가 가능하다면 반드시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 없는 한자 표현의 한계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시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 시는 알려진 바와 같이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삼고초려를 하였을 때 제갈공명이 유비에게 자신의 웅지를 은유적으로 드러낸 시이다.
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草堂春睡足, 窗外日遲遲.
큰 꿈을 누가 먼저 깨달았는가? 평생 나는 스스로 깨달았노라.
초당의 봄 잠은 넉넉하건만, 창밖의 해는 느릿느릿하구나.
삼고초려의 고사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되는 시이다. ‘초당’은 선비가 때를 기다리며 은거하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있다. 당시 공명은 낮잠을 자던 중이었고 유비가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제갈량이 잠에서 깨어나 유비에게 올린 시이다.
초야에서의 삶이 여유롭고 지루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큰 꿈을 알아줄 사람을 기다렸던 공명의 포부와 야망이 잘 드러낸 시이다.
이 호기심 많은 친구와 면담을 요청한 또 다른 꿈많은 청춘에게 다산의 기상이 담긴 나의 노졸한 글씨를 선물로 주었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