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학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교양을 ‘인간의 상호 이해를 즐겁게 해주는 의사소통의 양식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아울러 교양의 범주를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교양은 의사소통을 풍성하게 해야 한다. 교양은 억압적 표준, 불쾌한 과제, 경쟁, 심지어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려는 교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양은 교양으로 독립해서는 안 되며 테마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양은 정신과 몸, 문화가 함께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형식이며 다른 사람들의 거울 속에 자기를 비추어보는 형식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양은 잡학의 달인이 박식을 과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고 있다. 슈바니츠는 모르면 모를수록 교양이 되는 것들로 ‘유럽 왕실의 암투’, ‘텔레비전 프로그램’, ‘여성 잡지’ 등을 거론하였다.
이 세 가지는 다른 사람들과 한가하게 나눌 잡담의 소재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역할은 하지만 잡담이 끝나면 도무지 남는 게 없다고 말한다. 매우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한편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교양이란 지식 자체와는 구분되며 교양이 완성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인격’이다.”라고 말하였다. 참된 교양이란 학문이나 예술에 대한 지식과 소양을 얼마나 축적했느냐가 아니라 타인의 삶의 기쁨과 슬픔을 얼마나 절실하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슈바니츠가 ‘의사소통의 풍성함’에 방점을 두었다면 다카시는 ‘공감 능력의 절실함’을 강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양은 긍정과 부정, 좌와 우 양쪽에 속해 있는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그런 사람과 교제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두 학자의 주장을 근거하여 교양이 ‘타인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제고하는 일이다’라고 전제한다면 나의 사적 편견으로 교양을 갖춘 인생이란 혹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첫째, 언제든 다양한 소재로 좌중과 소통할 수 있는 스토리텔러로서 의사소통 능력이 풍성한 ‘소리 명창’.
둘째, 소리 명창의 개똥철학을 구원의 진리인 양 아멘으로 화답하며 공감하는 능력이 절실한 ‘귀명창’.
셋째, 좌중에 참석하였으되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도 언제든 가장 먼저 지갑을 열어 물질로 보시하는 ‘공양 보살’
내 생각에 ‘공양 보살’은 ‘귀명창’보다 한 수 위이고 ‘귀명창’은 ‘소리 명창’보다 한 수 위이다. 그러므로 ‘공양 보살’이야말로 이 시대의 참 교양인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