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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 根深之木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반백 년만의 해후였다.

초중등 동창인 네명의 친구가 중학교 졸업 이후 한자리에 모두 함께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우리는 베이비 붐 세대의 막내로서 농경사회에서 태어나 산업화 시대에 교육을 받고
, 민주화 시대에 청춘을 바치다 정보화 시대에 추월당하기 시작하여 백세시대에 다시 막내가 된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별종 세대이다.


대법관 정도는 당연히 할 줄 알았던 한 친구는 대기업의 중역으로 명퇴를 하였고
, 평생 학자로서 책과 씨름할 줄 알았던 한 친구는 외교관이 되어 30년을 해외로 유랑하였다. 예비고사가 폐지되고 학력고사가 처음 도입되어 모의고사에서 전국 차석을 하였던 수학 천재는 지금 카톡도 할 줄 모르는 원시인이 되어 세상과 단절하며 살고 있다. 반성문 단골 학생이었던 문제아 친구는 아이러니하게도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누구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 그는 수업을 빼먹다 걸려 담임 선생님이 반성문을 쓰라 하자 16절지 갱지에 무려 16장이나 반성이 아닌 반항문을 써서 개교이래 가장 긴 반성문으로 교무실을 뒤집어 놓았던 시대의 이단아였다. 자신의 학문적 성찰보다는 문교정책과 학교 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하여 일찌감치 싸가지 없는 놈으로 찍혔던 반항아적 문제아였다.


전교 수위를 다투던 모범생
3인과 방외인 문제 학생 1인이 그날의 기억을 가지고 한데 다시 뭉쳤다. 당시 동네에서 유일하게 잔디 있는 마당에 탁구대가 있던 브루조아 친구의 집에서 방과 후 탁구 시합을 하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추억담은 그칠 줄을 몰랐고 재회의 시간은 야속하게도 짧기만 하였다. 의기가 충천해진 우리는 매 분기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하고 마침내 모임을 결성하였다.


모임의 가칭은
근천회(根泉會)’이다.


뿌리 깊은 나무(根深之木)’샘이 깊은 물(源遠之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대신 을 넣어 발음이편하게 하였다.


우정의 뿌리가 깊고
, 지혜의 샘이 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급한 대로 일단 쓰기로 하였다. 아래는 한 친구의 작호기이다.


연안이씨 헌석(憲錫) 군은 성품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외양은 부드럽고 내면은 강하다. 옛날에는 나와 동학으로 함께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지금은 모범적 기업인으로서 경영에 뜻을 두어 특별한 사업을 널리 확장시키고 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는 곳과 품은 뜻에 따라 호를 삼는다.’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삼가 창암(窓庵)’이라고 호를 지어 헌석에게 준다.


이란 옛 선비들의 말에 작은 창에 햇살이 밝다.”하여 소망을 의미하였으며 이란 부동처(不動處)를 이른다. 그러므로 窓庵이란 욕망에 대하여 미혹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장차 뜻을 세워 독실이 행동하고자 하는 자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의지를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경자년 중춘에 하전이 삼가 기록하다.”

그러므로
窓庵이란 소망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다.’ 라는 의미를 담았다. 장로가 된 친구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 기대한다.


덧붙여 몇마디 더한다
. 단목(端木)단목유풍(端木遺風)’의 준말이다. 孔門十哲 가운데 子貢이라는 제자의 이름이 단목사(端木賜)’이다. 공자에게 최대의 칭찬을 들은 입실(入室) 제자로서 언어 외교 정치 경제에 탁월한 역량이 있었다. 그는 생전에 적재적소의 빠른 직관과 탁월한 수완으로 막대한 재물을 모았으며 공자의 주유천하에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후대에 경제적 성공으로 학문적 후원을 하는 청부(淸富)를 일러 단목사의 풍도가 있다고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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