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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민수 – 君舟民水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칼럼



군주는 배이고 서민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엎기도 한다. 군주는 이러한 생각을 함으로써 위기에 직면할 때 그 위기가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君以此思, 危則危將焉而不至矣.

-순자(荀子) · 왕제(王制)-

군주는 배이고 인민은 물이다. 물은 능히 배를 띄우지만, 역으로 충분히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

君舟人水. 水能載舟, 亦能覆舟. -정관정요(貞觀政要), 논정체(論政體)-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내가 사는 동네 골목길엔 길게 늘어진 계단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등교 시간에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였다. 골목길 계단에 교복을 입은 어떤 고등학생 형이 윗단추를 서너 개쯤 풀어헤친 채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았는데 그 아래에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늙은 여자가 무릎을 꿇고 가방을 끌어안은 채 눈물로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학교에 가라 이 에미 소원이다.”

“아 저리 꺼져~, 학교 안 간다구~”

어려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불량학생을 만든 원인의 팔 할은 그의 어머니에게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머니의 지나친 온정주의가 오히려 불량학생의 장래까지도 망쳤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선거는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일리 있는 소리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개선의 의지가 전혀 없는 차악에게 무슨 희망이 있으며 최악과의 변별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미워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고들 한다. 선거 때마다 고장 난 레코드 돌아가듯 하는 신파극에 눈물이 마른 지 이미 오래다. 이런 신파조의 온정주의가 불량학생을 만들어 내듯 반성 없는 구태 정치인을 양산하는 것이다.

‘검찰 파쇼 정권을 도와주는 격이다’라고들 한다. 검찰 파쇼 정권을 탄생하게 한 것이 누구 때문이란 말인가? 정치인의 진영논리는 자신들의 기득권 논리에 불과하다.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 공갈치지 마라. 먼저 당신들 밥줄부터 끊어 놔야 한다. 더 이상 직업 정치인들의 기만술에 농락당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 안 가겠다는 놈은 자퇴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당장은 인생 끝난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를 살리는 길이다. 지금의 민주당은 부서져야 한다. 죽을 만큼 철저히 부서져야 한다. 국민이 아픈 만큼 당신들도 포수인치(包羞忍恥)하고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해야만 한다. 그것만이 다시 사는 길이다. 현실의 두려움 때문에 개선의 의지가 전혀 없는 차악을 선택한다면 5년이 아니라 10년, 20년이 되어도 정권회복은 난망한 일이다.

민주당을 찍어야만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자칭 진보주의자들 또한 자신이 불량학생을 만든 어머니가 아니었는지 한 번쯤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할 때다. 회초리를 드는 아버지도 약을 발라주는 어머니도 모두가 자식 사랑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선거 때마다 진영으로 편을 나누어 ‘묻지마식’ 투표로서 거수기 노릇만을 한다면 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정의를 부정하는 일이다.

사랑에 눈먼 자발적 복종이 폭군에 의해 강요된 복종보다 더욱 해로울 수 있다. 폭군의 노예에게는 희망이 있지만, 사랑의 노예에게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지지자라고 해서 모두가 맹목적 거수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나는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하지만, 배를 전복시키는 역사의 흐름에 기어이 동참할 것이다. 수구 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긴 ‘구태 민주’는 마땅히 역대 최악의 참패를 당해야 한다. 한국 정치사에 다시 올 수 없는 180석의 힘과 촛불 시민의 지지가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해야만 한다. 지금은 ‘民’이 ‘君’을 전복시켜서 깨닫게 해줘야 할 때이다.

불가에서는 ‘大死一番絶後再蘇(대사일번절후재소)’라 하였다.

“크게 한번 죽어서 완전히 단절된 뒤에라야 다시 소생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길 만이 절대 진리에 이르는 외길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노·통의 추도식 때, 나는 그들이 봉하마을 너럭바위 앞에서 대성통곡하며 부형청죄(負荊請罪)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문재인’과 ‘민주당’은 아무도 사죄하지 않았다. ‘성공한 대통령’과 ‘졌·잘·싸’의 당당한 모습뿐이었다. 여야를 불문하고 거기 모인 정치인들 누구도 추모에 뜻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오직 노·통의 명성과 이미지를 도용하여 자신의 주가를 높이고자 하는 추악하고 노회한 정치적 욕망만이 드러나 보였을 뿐이었다. ‘노무현’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자들이라기보다는 단물만을 빨아먹고자 하는 이리떼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돕고 싶다.”라는 말 한마디에 노·통은 홀로 탄핵까지 당하는 수모를 감내했다. 과연 그들은 ‘염치’가 있는 존재란 말인가?

반성은 국민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 정치인들이 해야 할 몫이다. 성숙한 국민의 참다운 권리는 그들을 참회하도록 표로써 심판하는 것이다. 대의민주제에서 ‘기권’은 단순히 권리를 포기하는 ‘사표’가 아니라 민심의 또 다른 형태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늦었지만 민주당은 최선을 다해 진정성 있는 사죄를 하고 명분 있는 패배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지난 선거에서 나는 ‘民’으로서 ‘舟’를 전복시키는데, 나의 귀한 한 표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부활의 씨앗이 될 거룩한 그루터기에는 기꺼이 구명 튜브를 던졌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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