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친구의 소개로 얼떨결에 길동무 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문학 산책에 동반하게 되었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출발하여 정동 교회를 지나 고종의 아관파천의 비애가 서린 길을 걸었다. 광화문 길을 건너서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를 지나고 홍난파 고택과 권율 장군의 생가터와 앨버트 테일러의 딜쿠샤와 율곡의 서울 재택 지를 경유하여 독립문에 이르는 여정을 답사하였다.
시인과 소설가가 주류를 이루는 문학인 모임인지라 문학사적 의미를 조명하며 문학적 소재와 배경에 중점을 두고 탐방이 이루어졌지만, 나는 고전이 전공인지라 문자학과 고증학적인 부분에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중고등학교를 모두 종로에서 다닌 덕분에 이 지역은 거의 나의 ‘나와바리(なわばり)’나 다름없었다.
예전에는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과 걸으면 헤어진다.’라는 속설이 있었다. 그 이유는 돌담길 초입에 과거에 대법원과 가정법원이 있었는데, 이혼하는 부부들이 법원을 드나들면서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거기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싶다.
광화문연가의 낭만 일번지가 시작되는 그 유명한 정동 교회에는 초대 담임목사의 흉상이 있었는데, 흉상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니 ‘탁사(濯斯) 최병헌’이라고 쓰여 있었다. 전공자의 호기심이 발동하여 ‘탁사’의 의미를 잠시 묵상하였다. ‘탁배기를 한잔 사겠다’라는 의미는 절대 아닐 것이고 아마도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에서 따온 듯하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는 초연한 삶을 비유한 ‘탁영탁족(濯纓濯足)’의 정신을 간직하고자 ‘탁사’를 자신의 아호로 차용하였을 것이다.
홍파동에 있는 홍난파의 생가를 지나서 바로 옆에 구세군 영천교회가 있다. 일행들은 모두 이곳을 지나쳐 가고 말았지만, 교회 한쪽에 매우 남루한 암각 비문이 하나 있었다. 비문에 새겨진 글씨의 내용은 이러하다.
“성동인우 애지산학 -性同鱗羽 愛止山壑-”
원래 이곳은 율곡 선생의 서울 집터가 있던 자리였으며, 위의 8자가 새겨진 큰 암각 바위가 있었다. 1959년에 율곡의 사당인 문성사(文成祠)와 홍파강당(紅把講堂)을 지었고, 문성사에 선생의 신주를 봉안했다. 덕수이씨 종친의 불찰로 소유권이 은행으로 넘어가면서 문성사와 홍파강당은 철거됐고, 암각은 훼손돼 사라졌으며 지금의 교회 마당 벽 한편에 원래의 글자를 탁본한 비석 하나만을 볼품없이 붙여 두었다.
글의 뜻은 “하늘이 내린 성품은 물속에 사는 비늘이 있는 물고기나 하늘을 나는 깃털을 가진 새나 같은 것이며, 사랑은 가장 낮은 골짜기(壑)부터 가장 높은 산(山)에까지 미쳐야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시경과 중용에서 말하는 “연비여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 즉 ‘솔개는 하늘 위를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라는 고전을 바탕으로 한 사상이다.
사직터널 위쪽 행촌동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고목이 있는데, 이 나무는 도원수(都元帥) 권율장군(權慄將軍)의 옛집에 있었던 460년이 넘은 고목이다. 권율장군은 종로구 필운동 현재 배화여고 자리에서 살다가 사위인 백사 이항복(李恒福)에게 집을 내어주고, 이곳으로 이주하여 담장 안에 심어 놓은 것이다.
그 바로 옆에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 부부가 살던 ‘딜쿠샤(Dilkusha)’가 있는데 1923년에 지어진 건물이며 딜쿠샤는 인도 힌두어로 ‘꿈의 궁전’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의미이다.
독립문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에서는 독립지사들께 마음속으로나마 참회의 108배를 올렸다. 독립지사들의 단체 사진 배경인 태극기에 쓰인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울컥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불원복’이란 주역 ‘復卦’ 初九 효사에 나오는 말로서 “멀지 않아서 되돌아오니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요 길함의 으뜸이니라.”라는 의미인데, 머지않아 광복이 될 것이라는 지사들의 염원을 나타내는 말이다.
서대문형무소의 주소가 현저동 101번지인데, 현저동은 무슨 뜻이었을까를 생각해보니 고개 ‘현(峴)’ 자와 밑 ‘저(底)’를 써서 ‘고개 밑’이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추론을 해 보았다. 아마 무악재 고개 밑에 있으니 그럴법하다는 생각이다.
돌아오는 길에 때마침 소낙비가 내렸다. 수치스러운 오욕과 야만의 역사를 회상하며 소낙비를 흠씬 맞고 무작정 걸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을 몽땅 가린 개발독재의 상징인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더미를 보면서 이놈의 나라에 오만 정이 떨어지고 말았다.
피가 끓던 청춘의 시절 종로와 광화문을 주름잡으며 내 인생에 무엇인가를 할 것만 같았는데, 속절없이 세월은 흐르고 초로의 문턱에 서고 보니 계획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허망한 일인 줄 절절히 깨닫고 있다.
지하철에서 내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음습한 방앗간에 들려 홀로 탁배기를 한 사발 마셨다. 기어이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