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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최선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칼럼





아들이 마침내 대학을 졸업한다.

미국에 건너간 지 5년 만의 일이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모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20년쯤 전 녀석이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집에 두고 온 서류가 있어 점심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다 주차장에서 녀석을 마주쳤다.

먼발치에서 단박에 날 알아보고 “아빠~”하며 반갑게 뛰어오더니 황급히 가방을 열어 시험지를 꺼내서 흔들었다.
“하하 이 녀석이 백 점을 맞은 것이로구나”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시험지를 받아들었으나 암만 훑어봐도 점수는 분명 ‘28점’이었다. 아니 설마 이게~~^^

행여 누가 볼세라 주변을 살피며 녀석에게 물었다.

“야~, 너 안 창피하니?”

너무나 당황하는 내게 녀석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왜 창피해, 이거 내가 최선을 다한 거야”

“그리고 이거~, 내가 아는 문제는 다 맞았어”

뜨아~~^^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 나는 녀석을 하늘을 향해 번쩍 들어 올리며, “그래 잘했다 잘했어”하고 함께 깔깔 웃었다.

그날 나는 녀석의 알림장에 이렇게 썼다.

“28점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며 당당할 수 있는 네가 부럽다. 그런데 만일 과자 한 봉지에 25개의 과자가 들었는데, 7개만 먹고 나머지 18개는 먹을 수 없다면 그건 좀 억울하지 않겠니?

아빠는 당당한 너의 모습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네가 억울한 인생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늘의 기억을 훗날 네가 백 점을 맞게 되는 날까지 꼭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의 인생에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마침내 녀석이 백 점을 맞은 것이다.

한껏 교만한 몸짓과 시크한 표정으로 내게 시험지를 들이밀었다.

“아빠~, 이거 오늘 시험 본 거야, 너무 놀라지 마셔~, 백 점 해보니 별거 아니네~^^”

그날 나는 녀석의 알림장에 이렇게 썼다.

“백 점을 받은 것이 훌륭한 일은 아니지만 매우 기특하다. 그러나 언젠가 네가 28점을 받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듯이 100점을 받았다고 해서 자만해서도 안 된다.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면 언제나 결과에 당당하기를 바란다. 이제 25개의 과자를 다 먹게 되었으니 참 대견하다.”

그러나 그 후로 우리 아드님께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백 점을 맞은 일이 없었다. 그리고 잘난 그 아비 또한 아들에게 공부하란 소리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미국으로 건너와 마침내 대학을 졸업한다. 비록 랭귀지 스쿨을 2년이나 다녔지만, 대학은 오히려 3년 만에 조기졸업을 하게 되었다. 신입생 때는 영어가 서툴러 F를 두 개씩이나 받더니 3~4학년이 되어서는 다행히 전 과목을 모두 'A+’로 마쳤다.

그러나 아들의 성적이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다. 오히려 가슴이 저리도록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다.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 번도 알바를 쉬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군대를 제대한 뒤에도 딱 하루 쉬고 이튿날부터 바로 알바를 다녔다. 유학하는 동안 학비의 절반 이상과 생활비를 모두 제힘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다행히 어려서 익힌 태권도[공인 5단] 덕분에 한인이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에 사범으로 취직하여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었고 마침내 영주권까지 취득하게 되었지만, 영주권 스폰에 발목이 잡혀 풀타임으로 근무해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몸이 아픈 날에도 쉴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신분이라 비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허벅지의 근육 통증을 치료하지 못하고 일 년 넘게 참고 견디면서 일을 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크게 상심한 것은 아들이 유학 생활하는 동안 알바를 하느라 한 번도 학교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단 한 명의 친구조차 사귀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서럽고 불행한 처지를 만들어준 아빠의 무력함에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도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나 원망이 전혀 없다는 아들의 말에 너무나 송구하고 민망하지만, 한편으론 매우 듬직하고 기특하다.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걱정할 부모를 생각해 티 한번 내지 않고 전화할 때마다 ‘환경이 외로우니 기도가 저절로 되고 신앙심만 깊어진다’라며 너스레를 떨던 아들이 몹시 대견하다.

아들의 내일과 미래가 진심으로 기대된다.

이 녀석도 어느덧 손님이 되어 내 곁을 떠날 때가 된듯하다.

아니 어쩌면 벌써 저만치 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들의 인생을 축복한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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