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곡이조’란 같은 악곡에 노래를 달리한다는 뜻으로, 같은 곡조의 다른 운율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이는 근원적 동일성을 전제로 하되, 현상적 다양성의 결과를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다른 표현으로는 ‘동공이곡(同工異曲)’라는 말도 있다. ‘같은 재주의 다른 곡조’라는 의미로서 재주나 솜씨는 같지만 표현된 내용이나 맛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당나라의 대문호 한유(韓愈)는 자신의 글 「진학해(進學解)」에서 楊雲(양운)과 司馬相如(사마상여)의 문장이 ‘시문을 짓는 기교는 같으나 그 곡조는 서로 다르다.’[子雲相如 同工異曲]라고 한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일각에서는 ‘동공이곡(同工異曲)’이 처음의 의미와는 다르게 ‘겉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다’라는 경멸의 뜻을 담아 쓰이기도 한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가 되면서 우연히 온라인상의 줌을 통한 예배 모임을 알게 되어 참석하고 있다. 이곳 공동체의 구성원은 매우 오묘하고 다양하다. 사는 지역과 국가도 다를 뿐만이 아니라 믿음의 형태나 종교적 신분조차도 천차만별이다.
마리아 동정녀 설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고 아담과 이브를 설화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으며 바울 복음에 의한 기독론을 전면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험과 직관을 중시하는 의존적이고 주술적인 신자도 있다. 게다가 스스로 직통 신자임을 자인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성원이 존재한다.
얼핏 보면 한 가지 주제로 단합되거나 통일되기가 어려울 듯하여 단일대오를 형성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런대로 큰 마찰 없이 잘 운영되는 것이 신통방통할 지경이다. 저마다의 신앙의 수준이나 믿음의 형태가 다르기에 동일성이나 획일성을 강요치 않는다. 가장 큰 특징은 각인의 다양한 생각이나 신앙의 형태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계파성을 특별히 인정하지도 않지만, 굳이 따져 묻지도 않는다.
큰 틀에서 본다면 본인들 스스로가 창조주를 믿으며 신본주의적 세계관을 가지면 그만이다. 굳이 이단이네 삼단이네 하는 논쟁이 있을 수가 없다. 가장 큰 특징은 신앙 안에서 무엇이 옳다고 하는 신학적 정의를 내리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기독교의 특수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이 진리를 온전히 소유하고 있고 타인은 잘못된 길에 서 있다고 단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지식으로 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모두가 군맹무상(群盲撫象) 하듯 일정 부분의 오류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음을 포용하고 있을 뿐이다.
신앙은 때로 이성을 넘어서고 과학을 초월한다. 그러나 이성과 대화하지 않고 과학과 소통하지 않는 신앙은 위험천만의 수준을 넘어 독단의 도그마에 빠지기가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문자주의’나 ‘근본주의’ 등을 경계한다. 그렇다고 내 생각을 굳이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건강한 종교적 삶을 위해서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각인의 종교적 신념은 결국 각자의 몫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성을 가진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운영이 가능한 것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일보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적응하기가 매우 힘들고 불편하여 의도적으로 외면도 하였지만, 마땅히 내 영혼을 맡길 만한 곳도 없고 구성원이 대체로 현실 교회 부적응자(?)들이라는 데서 다소 위안이 되어 아직까지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굳이 나의 위치를 고백하자면 비주류 모임 중에 비주류로서 여전한 ‘독고다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임에 의미를 두는 것은 사람마다 삶의 형태나 수행 방법은 달라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종교적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학에서는 ‘주이불비 비이불주(周而不比, 比而不周)’라 하였다. “군자는 두루 친목하되 편당 짓지 아니하고 소인은 편당 짓되 두루 친목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친교를 도모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을 수 있다면 나의 삶 속에 종교와 현실이 크게 유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양한 신앙생활의 경험을 통한 구도의 방편이 저마다 다를지라도 삶과 죽음의 본질적 고민과 참다운 인생을 위한 영성의 승화를 위한 목적은 같다고 볼 수 있으므로 서로의 신앙관을 용납하되 본질에서는 벗어나지 않고자 한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일에는 관심 없이 값싼 은혜에만 안주하려는 의존적이며 주술적인 신앙을 거부하여 교회를 나왔지만, ‘문자주의’와 ‘근본주의’를 경계한다 해서 신학적인 논리로서 인간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규정지으려는 행위에도 깊은 우려가 있다. 이성적 분석만 있고 삶에 적용이 없는 것은 관념적 신앙일 뿐만이 아니라 일찍이 장자가 말한 “도적 중의 도적은 덕을 내세우는 도적이다.”[賊莫大乎德有心]라고 한 것과 같은 두려움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神이 내 안에만 있고 상대에게는 없다거나, 상대에게만 있고 내게는 없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나와 너, 우리 사이 어디쯤 계실 것이라 믿고 있다. 예수는커녕 자신이 어떤 인생인지조차도 모르는 채 맹목적 믿음만을 강요하는 거짓 목사와 교회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게는 전도의 대상이 따로 없다. 그저 모두가 선한 이웃이요 동반자일 뿐이다. 내게 있는 일용할 양식으로 이웃과 더불어 화평 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신앙의 본질이다.
‘一切衆生이 皆有佛性이요’
‘山川草木이 悉皆成佛이라’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