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년 전 TV 뉴스에서 이순신 장군의 부인 이름이 ‘방수진(方守震)’이라는 것을 역사학계에서 최초로 밝혔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으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 국보 76호로 지정된 이충무공 서간첩에 ‘처방수진(妻方守震)’이라 기록된 것을 보고, 간찰의 문리가 없는 어느 향토사학자가 학계에 주장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 주장은 명백한 오류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이항복의 <백사집(白沙集)>,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공은 군수(郡守) 방진(方震)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公娶郡守方震女, 生二男一女.]
이뿐만 아니라 김육의 <잠곡유고(潛谷遺稿>, 「이통제충무공신도비(李統制忠武公神道碑銘)」에도 이런 기록이 보인다. “공은 보성 군수(寶城郡守) 방진(方震)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公娶寶城郡守方震之女.]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장인의 함자가 ‘방진(方震)’인데 그 딸의 이름에 ‘진(震)’자를 넣어 ‘수진(守震)’이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항렬을 무시한 난센스이고 모순이다. 대체로 조선 시대의 기록에는 족보에서조차 여자의 이름은 오르지 않았다. 본관과 성씨만을 기록하고 여자의 남편인 사위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렇다면 ‘처방수진(妻方守震)’이라고 명기되어 있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를 현대식 문자 표현 그대로 ‘아내의 이름은 방수진이다’라고 번역한다면 명백한 오역이 되고 만다. 이런 식의 서술은 ‘아내는 군수 방진(方震)의 딸이다’라고 해야 옳은 번역이다.
한문식 표기법은 ‘판서 홍길동(判書 洪吉童)’이라 하지 않고, ‘홍판서길동(洪判書吉童)’이라 한다. 성과 이름 사이에 자신의 관직이나 직함을 넣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장인의 성인 ‘방(方)’과 이름인 ‘진(震)’ 사이에 관직명인 ‘수령’ 또는 ‘군수’의 의미인 ‘수(守)’ 자가 포함된 것이다.
군대에서는 통상 ‘관등성명’이라 하여 상관이 자신을 호명할 때, 자신의 계급의 등급과 성명을 함께 복창한다. ‘병장 김막동’ 또는 ‘대위 이복남’하는 식이다. 만약에 본인 스스로가 ‘이복남 대위입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자신의 신분을 ‘대위’로 대접해 달라는 의미인 것이다. 김 아무개 교수, 이 아무개 기자, 박 아무개 목사 등은 모두 타인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어이지, 본인이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다.
간혹 TV나 매스컴을 통해 본인이 자신을 지칭하면서 ‘김 아무개 교수입니다.’ ‘이 아무개 기자입니다.’ 하는 식의 발언을 들을 때가 있다. 이는 자기 자신의 직업이나 직위에 대한 자부심의 발로로서 상대에게 자기의 신분을 대접해 달라고 강요하는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무례한 발언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대접할지는 온전히 상대방의 판단에 맡겨둘 일이지 상대에게 강요할 성격이 아니다. 저는 ‘제일 대학교 교수 최 아무개입니다.’ 또는 ‘저는 최고기업의 부장 정 아무개입니다.’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불교에는 ‘보살(菩薩)’이라는 호칭이 있다. 이는 ‘보리살타(bodhi-sattva)’의 준말로서 보디는 ‘깨달음’, 삿트바는 ‘중생’을 뜻하므로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또는 ‘구도자’라는 의미이다. 보살의 수행을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上求菩提, 下化衆生.]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구도자로서의 석가모니를 지칭하던 것이 대승불교에서는 미륵불이나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관세음, 문수, 보현, 지장····· 등과 함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아울러 보살이라 하였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 와서는 ‘득도한 고승’을 지칭하다가 불교의 탄압이 심했던 조선에서는 주로 여성이 절에 다녔으므로 ‘여신도’를 지칭하는 의미로 쓰였다. 그것이 현대에 와서는 ‘부처의 도를 좇는 일체의 중생’을 일컬어 보살이라 하게 된 것이다.
‘보살’이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기독교에서는 비슷한 유형으로 ‘형제자매’라고 하는 호칭이 있다. 성경에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 다 사랑한다.’라고 하는 이율배반적인 메시지처럼 의미의 실체가 다소 모호하다. 과연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자격에 두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있을 수 있을까?
실제로는 대개 교회 안에서 주로 신자들끼리 ‘예수 안에서 하나 된 형제자매의 신분’임을 나타내기 위한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교회 밖의 예수 안 믿는 자들을 모두 남이나 원수로 돌리는 이분법을 낳는다. 비신자에게는 기독교적인 선과 악의 편 가르기식 발상으로 비칠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교인들이 내게 ‘형제’라는 호칭을 쓸 때마다 낯이 간지러워 속으로 반문한다. 과연 이 사람은 ‘형제’라는 표현에 진정성이 있는 것일까? ‘형제’라는 의미가 갖는 무게감과 책임감의 의미를 알기나 하고 이렇게 호칭하는 것일까? 입안의 사탕처럼 ‘형제님’ ‘자매님’ 하다가도 조금이라도 관계가 소원해지면 ‘형제’에서 ‘원수’로 변하는 교인들의 변덕과 외면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친소관계에 기반하여 가변적으로 사용되는 그 칭호가 늘 부담스럽고 위선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마치 북한에서 사용하는 ‘동무’라는 호칭처럼 매우 불편하고 어색한 느낌이다. 동무라는 말 속에는 ‘이념’과 ‘가치’의 계급적 일반화와 함께 장유유서의 전통적 질서를 무시하고 신분적 동일성만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목적이나 지향점이 같은 ‘동지(同志)’라든가 깨달음을 목적으로 같은 도(道)를 수행한다는 철학적 의미로서 ‘도반(道伴)’이라 한다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직분이나 존칭으로 호칭하는 편이 훨씬 거부감이 덜할 것이다.
아무런 애정 없이 상투적으로 내뱉는 형제라는 표현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하는 무성의한 악수처럼 불쾌한 감정을 유발하게 할 뿐이다. ‘진금부도(眞金不鍍)’라는 말이 있다. ‘진짜 금은 금색을 덧칠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진짜 형제는 굳이 서로를 향해 형제라 칭하지 않는다. 가짜 형제일수록 호칭 때마다 애써 형제임을 강조하며 공동체의 결속을 강요하기 마련이다.
잘못된 칭호와 함께 전통사회의 다양한 호칭의 문화가 급속히 사라져 가는 세태가 매우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