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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단상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최병효 칼럼
어려서부터 넓은 세상을 보는게 꿈이었다. 전주북중 1학년 무렵부터는 조그만 배로 누가 태평양을 건넜다는 등의 소식을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접하면 가슴이 뛰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친구와 끝없이 여러나라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래서 외교관이 되면 그런 꿈을 이루리라는 생각으로 1968년에 서울대 외교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1때부터의 그 친구는 화학공학 엔지니어가 되어 세계를 누비며 살다가 은퇴하여 서귀포 '외돌개 팬션' 주인이 되었는데 아직도 역마살을 못이겨 지금 이 시간에도 바르셀로나에서 프랑스 지중해 연안을 거쳐 로마까지의 자전거 대장정길 어느메를 헤메고 있다.

대학에 들어가보니 우리가 처한 정치 사회적 현실이 참 암울하고 답답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공릉동 서울공대 캠퍼스에서의 교양학부 시절에는 10여명과 모여 무슨 연구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정치학과 교수로 막 부임한 장위돈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가끔씩 정치 사회문제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현실 참여 이전에 먼저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인자한 교수님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회원중 사회학과의 유인태, 법대의 이인제 등은 후에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학교가 시골에 있었기에 1학년때는 대부분 반독재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2학년에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로 오면서 3선 개헌 등 강화되는 군사독재의 현실에 직면하여 가끔씩 시위에 동참하면서도 폭력적인 양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본격적인 학생운동은 마음에 없어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하게 되었다.

와중에도 불문학 공부가 재미있어 불문학과 3학년 강의까지도 들었다. 문리대의 그 희귀한 여학생들과 사귀어 보려고 불문학 강의 듣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었다. 사회학과 고영복 교수님(지금도 이해가 안된 일이지만 후에 간첩불고지죄로 체포되어 옥살이)의 사회학 불강 (Auguste Comte)은 수강생이 5명이라 교수실 소파에 앉아 강의를 들었는데 사회학과 67학번 여학생이 하나 있어  분위기가 좋았다. 운동화를 신고 다녔던 예쁘고 총명했던 그 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가끔 궁금한 생각이 든다. 그 분 졸업 얼마 후 가회동 주택가에서 조우하였는데 무엇하냐고 물으니 별로 하는 일 없다고 좀 쓸쓸히 웃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영어는 스스로 제법 잘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어려워서였는지 영문학 강의는 듣지 않고 문리대 운동장 뒷편에 있던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 라는 곳에 들어가 1주에 몇번 미국인으로부터 1년간 회화를 배웠다. 전주고 1학년때 미국평화봉사단원으로부터 회화를 배운후 처음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오신지 얼마 안되어 참신한 이미지로 존경을 받던 노재봉 교수님(국무총리 역임)은 외교관이 화려해 보이나 은퇴후에 남는 것은 여행가방과 양복 몇벌 뿐이니 잘 생각하라고 말씀 하시곤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회사에 취직해서 돈 버는 삶은 상상하기도 싫었으니 유학길에 오르는 것이 대안인데 군대 가고 유학자금 마련하고 하는 일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들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진로 방향을 못잡고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니 이제 졸업인데 군대 마치고 백수 노릇 하는 신세가 될 것 같아 정신이 들었다.

정치학과 친구들은 학생운동에 매진하여 감옥에 가고 제적되거나 언론계 등으로 빠지고 외교학과는 신사들이라 험한 일은 못하니 아무래도 원래의 목적대로 공직으로 가자는데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되어 모두들 방학때 짐 싸들고 절이나 시골로 내려갔다. 군사독재는 영원할 수 없고 대한민국은 영원할 것이니 참고 지내면 민주시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공직의 길을 합리화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외교학과 20명 동기생중 6명이 외무고시(당시는 3급 외무직), 6명이 행정고시(3급 행정직), 1명이 사법시험을 거쳐 검사가 되는 등 13명이 공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장관, 시장, 국회의원 등 화려한 공직생활을 한 친구들도 있다.

나로서는 1년 정도 공부해서 졸업 직후 외무고시에 합격한 것이니 큰 고생은 안한 것인데, 당시 외교학과생들은 젊은 총기와 엘리트 의식이 넘쳐서 요즘 우리 올림픽 선수들처럼 하면된다는 자신감에 차있어 좋은 결과를 낸 것이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이 이번 시험은 네가 1등 할 것이라고들 했고 건방지지만 나도 그렇게 자신을 하고 있었다. 그 근거로는 당시 내가 선택한 영어 불어 중국어의 세과목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신이 있었고 그 외의 국제정치, 국제법, 경제학, 외교사 등 여타 과목도 학교에서 평소 수강했던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에도 이런저런 명분으로 어쩌다 동숭동 대학로를 헤매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세느강이라고 부르던 교문 밖 개울은 복개되어 그 위의 미라보 다리와 함께 사라지고 은행나무들 옆의 도서관도 운동장도 흔적이 없어 생소할 뿐이다. 그래도 아직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로니에와 라이락, 은행나무들을 바라보면 아쉬웠던 젊음의 흔적 때문인지 아련한 슬픔에 가슴이 메이곤 한다. 그 캠퍼스에서 이루지 못한 새파란 로맨스가 많았던 분들의 심사야 오죽할까 상상해 본다. 이제 그 곳은 나이 든 우리들로서는 가급적 피해야 할 출입금지 지역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최병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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