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생활 12년을 포함하여 아시아. 태평양 지역과 미국에서 20여년을 살았고 또 외교부 본부 근무 중과 은퇴 후 세상 여러 곳을 다녀봤으니 그 중 어느 곳이 가장 좋았었던가 하는 질문도 받고 스스로 자문해 보기도 한다. 자연경관, 문화유산, 문화시설, 건축물, 일상의 편리함 등으로 구분해서 국가나 도시 단위로 생각해 본다. 그 중 도시는 일종의 종합예술이기도 하고 역사와 정치.사회.경제가 응축되어 있는 장소이기에 좀 복잡한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도시는 그 인구수나 세계 3대 미항이니 하며 지리적 건축적 아름다움 또는 그것이 가진 종합적 예술성으로 따지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6대주에서 크다는 도시는 거의 가봤다고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가장 마음에 남는 곳이 이스탄불이다.
나를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는 그 이스탄불에 대한 영문 모를 ‘그리움의 근원’이 무엇일지 항상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 수년전 Orhan Pamuk(이스탄불 출신 작가,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Istanbul- memories and the city’ 라는 책이 눈에 들어와 사두었었다. 오랫동안 표지만 바라보다가 드디어 그 책을 읽을 차례가 되어 몇 달 전부터 지하철에서 가끔씩 읽기 시작하여 오늘 마침내 집에서 끝장을 보았다. 파묵의 소설은 아직 한권도 읽지 못했지만 원래 소설보다는 역사.철학.인문.지리 등과 관련된 책을 좋아하므로 그의 자전적 수필집 ‘Istanbul’에 손이 먼저 간 것이었다.
이스탄블을 웬만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모두 읽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매우 지루하기도 하다. 무슨 책이든 시작하면 중도에 그만두기 싫어하는 평소의 독서 습관에다가 그 도시에 대한 막연하고 강렬한 어떤 감정으로 인해 이를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 책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주제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는데 점차 그것이 터키어로 hüzün 이라고 하는 melancholy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우연하게도 내가 이스탄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그리움과 통하는 감정이기에 읽어갈수록 지루함을 넘어서 작가의 hüzün에 같이 빠져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우울함이나 슬픈 느낌이라는 Melancholy는 그리움이라는 nostalgia와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으나 후자가 지나간 좋았던 것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라면 전자는 삶에 대한 좀 더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감정이 아닐까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인간의 기본적 인성을 4가지 성정으로 구분하였고 고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이를 의학이론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이는 무기력적 성정, 신경질적 성정, 우울적 성정, 낙천적 성정으로 한 사람이 두개 이상의 성정을 가질 수 있으나 어느 하나가 과도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보고 의학적 치료를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 내가 이스탄블을 잊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nostalgia를 넘어서 그 도시가 주는 melancholy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melancholy가 뭐기에 하필 나는 그 감정을 그 도시에서 태어나서 평생 그곳에서 살며 저술하는 파묵과 같이 유독 이스탄블에 대해 그리 오랫동안 품어왔던 것인가. 서울이나 도쿄 교토 베이징 샹하이 방콕 등 아시아 고도, 런던 파리 베르린 모스코바 생테 페체르브르그 마드리드 로마 베니스 리스본 바르샤바 등의 유럽 고도, 카이로 예루살램 테헤란 등 중동의 고도나 뉴욕 워싱턴 DC LA 멕시코 시티 상 파울로 리우데자네이로 시드니 등 신세계 여러 도시에서도 분명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법한데 지금까지 유독 이스탄블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를 파묵이 대신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Robert Burton이라는 영국인은 일찍이 1621년 ‘The Anatomy of Melancholy’에서 ‘All other pleasures are empty. None are as sweet as melancholy’라고 했다는데 melancholy라는 느낌은 분명 나르시스적 달콤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어떤 이에게는 단지 사춘기적인 성장통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감정일 것이나 또 다른 이에게는 평생 지속되는 일종의 병이기도 할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우울증(depression, melancholia)이나 허무함(nihilism)으로 타락하지 않고 사춘기적 처럼 생의 무엇에 대한 막연한 우울함이나 막연한 슬픔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Burton이 말한대로 인생이 제공하는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전통적 정서의 하나라는 ‘한(恨)’ 은 과거 지향적이지만 카타르시스적 기능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또 일본미의 중요한 요소인 ‘사비(寂)“는 ’세련된 한적함‘을 의미한다는데서 이 서양의 melancholy와 비교될 수 있는 느낌일지도 생각해 본다. 그러나 ’한‘은 궁극적으로 풀어야 되는 것이지만 ’사비‘나 melancholy는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아름다울 수도 있는 감정이 아닐까 한다.
이스탄블이 나나 파묵에게 주는 hüzün 은 고대 그리스 식민도시 비잔티움에서 330년에는 동로마제국 천년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또 1453년 이후 오토만 터키 제국의 수도 이스탄블로, 1922년에는 신생 터키공화국의 수도 지위를 잃은 상업도시로 수천년의 흥망성쇠를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속되는 끈질긴 역사의 그림자가 분명 큰 역할을 하는 것일 것이다. 내가 오래 전에 잠시 둘러 본 그 도시는 학생시절 국제정치학에서 지정학적으로 그리도 중요한 곳이라고 귀가 닳도록 들었던 그 유명한 Bosphorus-Dardanelles 해협을 끼고 있음에서 그 역사적 운명이 결정지어졌을 것이다.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진하려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그 해협의 서쪽이 유럽의 이스탄블이고 그 동쪽이 아시아의 우스크다르인데 1974년에 현수교가 처음 놓여졌고 지금까지 세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나도 그 유명한 다리를 건너 노래로도 유명한 우스크다르 해변가 식당에 들렀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의 뇌리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높은 언덕 위 오래된 이슬람 궁전들과 Aya Sophia 성당 외에 바닷가 유서 깊은 옛 유럽 열강의 공관과 관저지역이다. Sublime Porte(Ottoman Porte or High Porte, 술탄 궁전 입구 대문으로 그곳에서 술탄의 지시나 판결이 공포된데서 유래) 라고 불리던 오토만 터키왕국과 유럽 열강들의 오랜 외교적 접촉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아직도 국제평화에 대한 합일점을 찾지 못한채 갈등하고 있음은 이스탄블 같은 곳에서 느끼게 되는 hüzün 을 정치적 차원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지나간 것에 대한 또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막연한 사춘기적 그리움과 두려움에 집착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남의 땅과 역사에 엉킨 hüzün 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문화와 사상만을 강요하는 서구문명의 오만에 기인하는 것일까?
세익스피어의 ‘The Tragedy of Hamlet’이나 괴테의 ‘The Sorrows of Young Werther’ 는 melancholy를 문학을 통하여 인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보편화시킨 불후의 명작이다. 파묵의 ‘이스탄블’ 같은 자전적 hüzün 도 인간과 역사에 대한 동서양의 공감대를 넓혀 문명간의 갈등을 해소시키는데 기여할 것을 기대해 본다.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최병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