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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화가 이중섭의 부인이자 '뮤즈' 이남덕 님 별세에 부쳐

전 청와대 춘추관장,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김기만 칼럼
국민화가 故 이중섭(1916-1946)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씨가 지난 13일 노환으로 일본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다. 향년 101세.

고인과 꾸준히 접촉해 왔으며 오늘날의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을 만든 일등공신인 이 미술관의 전은자 학예사(큐레이터)는 30일 "마사코 여사의 사망 소식을 최근 유족과의 전자우편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참 묘하다. 일은 몰린다. 필자는 지인인 전은자 학예사의 초대로 이달 초 이중섭미술관의 <청년 이중섭, 사랑과 그리움>전(올 3월 개막, 8월 28일 종료)을 보고 왔다. 이중섭 작품이 총출동했고, 평소 그와 직간접 인연을 맺은 故 한묵(2016년 102세로 작고한 이중섭과 동갑의 절친. 작품과 인물)화백 등 32명의 저명 작가들이 작품을 낸 <숭고한 기증전>까지 같이 열려 로또를 맞은 기분일 만큼 좋았다.

이어 지난 주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울 소격동)에서 이달 12일 시작된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특별전>에 다녀왔다. 지난 해 삼성그룹이 기증한 이중섭 작품 80여 점에 기존 소장품 10점을 더했으니 관객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밥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만큼 잘 차려졌다. 황홀했다.

이남덕은 이중섭보다 5살 어린 일본 동경문화학원의 후배. 이중섭이 유학생활을 시작한 1937년부터 사귀었다. 귀국한 이중섭은 1940-1942년 일본에 있는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림 엽서를 집중적으로 보낸다. 서귀포 미술관과 현대미술관에 잘 소장, 전시되고 있는 '편지화'가 그것들이다.

마사코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연서(戀書)가 대부분. 거의가 일본어로 되어있다. 이 무렵 이중섭은 연인에게 한국이름 이남덕(李南德)을 지어준다. '남쪽에서 온 따뜻한 여인'이라는 뜻이다.

이남덕은 1945년 일제의 패망 직전 배를 타고 원산(元山)에 건너와 전통혼례를 올렸다. 둘은 두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가난과 싸워야 했다.

적빈(赤貧)을 견디다 못한 화가 가족은 제주도 서귀포까지 가서 1951년 1년을 살았다. 서귀포시가 이중섭미술관을 유치한 근거이다. 이 때의 그림에는 게, 물고기, 가족 등이 빈번히 등장한다.

살림은 여전히 극빈이었고, 중섭은 캔버스도 화지도 없으니 맨 종이, 합판, 담뱃갑, 은박지 등에 그림을 그렸다. 이남덕은 불가피하게 가난한 화가 남편의 모델이 되면서 작가의 '뮤즈'가 되었다.

이 같은 '은지화'(銀紙畵)는 담뱃갑 속의 은지에 송곳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흠이 생기도록 선을 그은 뒤, 그 음각선(陰刻線) 부분에 색을 먹인 일종의 선각화(線刻畵)이다. 이 은지화 석 점이 뉴욕근대미술관(MoMA)에 소장되어 있으니 '그림의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마사꼬는 부친이 별세한 1952년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 중섭은 1953년 7월 동경에 가 일주일간 가족과 같이 보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1956년 만 40살에 무연고자로 요절할 때가지 그는 더 이상 가족을 보지 못했다.

1956년 9월 6일. 이중섭이 영양실조와 간장염으로 사망할 때 그는 혼자였다. 죽음 직전까지는 동갑에 절친인 한묵 화백의 성북동 집에 있었다. 사망 후 행려병자로 처리되었다가 한 친구가 신원을 확인,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불운한 천재화가인' 그는 평생 힘들었다. 가족 건사도 빵점이었다. 밖에서는 그를 "시적(詩的) 미(美)와 황소 같은 화력(畵力), 용출(湧出)하는 사랑을 소유한 천재"(시인 具常)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 생계가 안되었고, 가족들 주린 배를 어찌하지 못할 때 그의 쓸쓸함과 절망감은 어땠을까? 앞의 구상 시인은 "중섭의 은지화를 보면 예술적 감상이 안되고 눈물부터 났다"고도 썼다. 중섭의 두 아들 중 장남은 사망했고, 차남(태성)은 63세이다.

결국 홀로 가야만 하는 구도자 같은 예술가의 길, 어쩌겠는가? 고흐도 평생 작품 딱 한 번 팔아봤다고 한다(그것도 畵商인 동생 테오가 사준 것).

경매 때마다 최고 금액을 경신하는 故 박수근 화백은 6.25때 미8군에서 군인들 초상화를 그려주며 연명했다. 그 옆자리에서는 고 박완서 대 작가가 타이피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이중섭 편지화 중 하나인 <아들과 복숭아>를 옮겨본다.
<태성에게. 잘 있었어?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지 궁금하구나.../엄마와 태현이 감기 걸렸다던데, 빨리 낫도록 잘 보살펴주기 바란다. 아빠가 태현 형과 태성이가 커다란 복숭아를 갖고 노는 그림을 그렸단다. 그럼 안녕, 아빠>.

평남 평연군이 고향인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화백. 불광불급(不狂不及)의 불꽃 삶이었습니다. 안식을 빕니다.

/김기만 전 청와대 춘추관장,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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