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
1908년 '경성감옥'으로 생겨나 1987년 경기 의왕으로 이전할 때까지 90년간 '공포의 공간'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투사들에게, 해방 이후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화운동가, 야당 정치인, 재야인사들에게.
이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저명한 이름들도 부지기수다. 1924년의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강우규 의사부터 현대사의 인혁당 문세광, 김두한, 김재규까지...
이 형무소에서 세 차례, 약 2년(생애 통산은 8년) 옥살이를 했던 '긴조(박정희 대통령 때 발령된 9차례의 긴급조치의 약칭)세대'의 맏형 장영달 민청학련 동지회 상임대표(전 4선 의원, 국회 국방위원장)는 "이 부근에 오면 지금도 울렁증이 온다"며 "애국 선혈들과 민주투사들의 원혼이 떠돌고 있을 민족의 성지"라고 말한다.
#1. 민주지사 특별전 배경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궐기는 매우 중요하게 평가된다.
1년 반 전인 1972년 10월에 선포한 이른바 '10월 유신체제'로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자신해 오던 박정희 철혈독재군부 정권의 심장을 향해 전국의 대학생들이 계속 크고 작은 저항을 해왔고, 1978년 4월의 민청학련 사건은 마침내 유신체제의 심장에 정조준한 총을 쏜 셈이었기 때문이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반 독재 투쟁의 외연이 크게 확대되어 학생세력에 비판적 지식인, 재야 반정부 인사, 일부 정치인, 양심적 종교인들이 가세하며 도도한 강물을 이룬다. 종교인 참여는 자연스레 신자들을 불러들여 운동 저변을 국민들로 확대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런 대하(大河)의 흐름은 국제적으로도 반 박정희 여론을 일으켰고, 결국 민청학련이 구심점이 된 朴정권 타도세력은 '부마(부산 마산) 항쟁'과 유신 붕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나아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반이 된다.
유신 정부가 "국가를 전복하고 공산정귄을 수립하려 했다"는 어마어마한 혐의를 뒤집어씌워 전국 대학의 지도자 180여 명을 구속, 기소하는 초강경 대응으로 민청학련 용공사건을 조작해 낸 것은 스스로 느끼는 위기감이 컸고, 그럴수록 더욱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내부 강경파들의 주장이 압도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 때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철, 유인태 전 의원은 지금껏 <사형수>로 불린다.
#2. 민청학련 故人 4명 추념 기념식
3일 추념식을 올린 여정남, 윤한봉, 나병식, 김병곤 네 명은 서울 서대문구청이 '올해의 민주지사'로 선정한 분들이다. 이들은 각기 31, 60, 64, 37년의 상대적으로 짧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거룩한 희생이 어찌 90, 100세이 비해 짧겠는가?
민청학련 경북대 책임자에 이어 인혁당 재건위 학원조직책으로 체포되어 50일간 끔찍한 고문 끝에 1975년 4월 9일 사형 선고 다음날 31살로 사형이 집행된 여정남. 2007년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저 천인공노할 사법살인의 죄과는 누가, 어떻게 치를 것인가?
전남대 재학중 민청학련 투쟁을 주도한 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핵심역할을 했던 윤한봉은 현상 수배되자 밀항해 미국에 망명했다. 수배 해제로 1993년 12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5.18아카데미 교장 등 활발히 활동했으나 망명 중 얻은 폐기종 악화로 2007년, 생을 마감했다.
서울 문리대에서 민청학련을 이끌었던 나병식 하면 '풀빛출판사'가 떠오른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처음 폭로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출간하는 등 출판운동에 매진했던 그도 고문 후유증으로 2013년 숨졌다.
넷 중 가장 젊은 김병곤(1953년생)은 서울 상대 재학중 민청학련 투쟁의 서울시내 대학간 연결과 인쇄작업을 맡았다.
그는 특히 민청학련 사건으로 1974년 7월 사형을 언도받자 이런 최후 진술로 사람들을 울린 것으로 유명하다.
"검찰관, 재판관님. 영광입니다. 사실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뺏긴 이 땅의 민생들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이날 기념식에 이어 토론회가 예정되었으나 시간관계로 생략되었다. 다만 군부독재 정권들이 저질렀던 녹화 사업의 실체 일부가 발표되었다. '강제징집녹화위'(강제징집, 녹화, 순화, 선도 진상규명 추진위원회)에 따르면 그간 확인된 녹화사업 해당자만 3 805명에 이른다.
# 3. 서대문형무소 괴담, 사족
3천2백명을 수용하는 서대문형무소 90년 역사에는 근현대사에 명멸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긴조'세대, 특히 민청학련 사건 관련 수인들은 감옥생활이 한결같이 그렇게 당당했다고 전해진다.
사형이 집행될 때 속옷에 대변을 쏟는 것을 막기 위해 전날 저녁식사를 주지 않는다는 얘기는 확인해 보니 사실이 아니었다.
또 자유당 때 정치깡패로 이름을 날렸던 이정재가 사형장으로 가면서 흰 고무신이 흙탕물에 젖지 않도록 진 땅을 피해 마른 땅으로 옮겨 걷더라는 얘기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한센 병동과 여성 전용 감옥도 있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나오면서 징하게 아름다운 초가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정권은 꼭 그렇지 않다고 보지만 우리가 이나마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자유로운 세상에 살 수 있는 것은 저 민청학련 사건 당사자 같은 분들의 피나는 희생 덕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