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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탈입망 - 坐脫立亡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칼럼

불가에서는 죽음을 맞이할 때 단정히 앉은 채로 왕생하는 일을 ‘좌탈(坐脫)’이라 하고, 선 채로 입적하는 일을 ‘입망(立亡)’이라 한다.

법력이 출중한 고승이나 불심이 입신의 경지에 이른 선승들이라야 가능할 이야기다.

불가에서는 죽음을 단순히 인간의 육체가 사망한 것으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육을 입은 생명의 존재가 미혹과 집착을 끊어내고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하여 최고의 경지인 열반에 이른 것으로 여긴다.

이는 죽음을 ‘당하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고행과 수도를 통한 깨달음의 결과물인 ‘달성의 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현철한 노승은 불교를 일러서 ‘가장 고상한 방법의 고차원적 자살’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

나의 영혼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언제 갈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에 인간이 자신의 죽는 날을 미리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다행한 일이 될 것인가? 아니면 불행한 일이 될 것인가?

죽음을 준비하고 받아들여서 집착을 포기하고 욕망을 내려놓으며 사는 겸손한 인생도 있겠지만 불굴의 의지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기적과 같은 일은 아마도 세상에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세상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신이 인간에게 자신이 태어날 날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도록 한 것처럼, 죽는 날 또한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생과 사의 영역은 오직 신만이 결정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이어야 한다는 것을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령화 시대에 ‘장수’가 꼭 복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질병이나 여타의 이유 등으로 정신적인 혼수상태에서 생물학적 연명만을 한다거나 육신의 기력과 정신이 노쇠하여 여생이 자신에게 고통이 되고 타인에게도 무거운 짐이 되는 경우, 이때의 수명 연장을 과연 장수의 복이라 할 수 있을까?

탈속한 신선의 세계와 같은 좌탈입망의 경지는 신화 속 전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고 나와 같은 범용한 인생은 그저 국가가 일정한 연령이 되면 ‘안락사’든 ‘존엄사’든 선택지를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고사가 있다. 풀을 묶어 은혜를 갚는다는 말인데, 죽어서도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다. 진(晉)나라의 위무자(魏武子)는 병이 들자 아들 위과(魏顆)에게 자기가 죽으면 자기 후처(위과의 서모)를 개가시켜 순사(殉死)를 면하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정신이 혼미해진 위무자는 후처를 순장하라고 유언을 번복하였다. 위무자가 죽은 뒤 위과는 아버지의 첫 번째 유언에 따라 서모를 개가시켜 순사를 면하게 하고서 말했다. “병이 위독하면 정신이 혼란스럽다. 나는 정신이 맑을 때 내린 명을 따를 것이다.”

훗날 진(秦)나라가 진(晉)나라를 침공하여 싸울 때 위과는 어떤 노인이 풀을 묶어 상대의 장수 두회(杜回)를 막는 것을 보았다. 두회는 넘어져 고꾸라져 잡히고 말았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개가시킨 여자의 아버지요. 당신이 아버지가 정신 맑을 때의 명에 따랐기 때문에 내가 보답을 한 것이오.”

위과의 ‘효자종치명 부종난명(孝子從治命, 不從亂命.)’에서 ‘결초보은’의 고사가 유래하였지만, 한편으로 효자는 ‘치명(治命)’ 즉 맑은 정신으로 하는 유언을 따르는 것이지, ‘난명(亂命)’ 곧 혼미한 정신으로 하는 골자 없는 유언을 따르지 않는다는 법도가 생겨난 것이다.

사후 세계에 대한 막연함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고 가게 되어 남겨진 인연들께 경황 중에 무질서와 혼란을 안겨 주게 되는 것이 두렵고 죄송한 것이다. 일정 연령이 되어 삶을 마감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맑은 정신으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인간의 마지막 권리에 대한 국가의 의무요 인권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숨 가쁘게 살아온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니 조급한 경쟁심 때문에 빨리 빨리만을 외치며 ‘슬로우 라이프’에 대한 각성을 하지 못했던 정신적 무지와 성찰에 대한 빈곤이 매우 안타깝고 후회스럽다.

치열한 생존 경쟁의 사회에서 별다른 경쟁력도 없이 그저 조직의 이단아로서 변방의 아웃사이더가 되어 떠돌던 인생도 이제는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하나 정리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죽음의 시간을 분별할 재간도 달성할 공력도 갖추지 못하였는데, 어느 순간 부지불식간에 당하는 것이 운명이라면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어느 때고 순전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후회를 덜 남기는 인생이 될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욕망을 벗어버리고,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기준에 맞추는 삶이 아닌 그저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

‘반드시 해야 한다.’라고 여겼던 일조차 과감히 비워내고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좇으며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가 없도록 느리지만, 천천히 기웃기웃 구경이나 하면서 한세상 소풍을 ‘경이’와 ‘신비’로 채우고 싶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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